“5년 마다 허가권을 다시 심사 받아야 한다는 건 다른 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로벌 유통 전문지 영국 무디 리포트의 더못 데이빗 사장이 최근 방한했을 때 한 이야기다. 그는 “다른 나라들은 정부 차원에서 면세점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며 인허가권을 통해 면세점 사업을 규제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부의 인허가 정책이 얼마나 세계적인 흐름과는 동 떨어져 있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락가락 인허가 정책은 면세점 업계를 사실상 파국으로 내 몰고 있다. 지난해 11월 면세점 특허 재승인 심사에서 기존 업체들을 탈락시킨 정부는 4개월도 안 돼 다시 추가 허용으로 이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사이 탈락 업체들의 직원들은 심각한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새로 특허권을 딴 신규 면세점 업체들도 “그럼 도대체 지난해 심사는 왜 한 것이냐”며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원칙 없는 정책으로 면세점 업계의 혼란과 경영의 최대 적인 사업 불확실성만 커졌다는 목소리가 높다.
탈락 면세점 직원들 울렁증 대인기피증 호소
충격파가 가장 심한 곳은 현장이다. 면세 특허 재승인 심사에서 떨어진 서울 잠실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과 SK네트웍스 워커힐점의 직원들은 상당수가 울렁증과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29일 서울 잠실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에서 만난 26년 경력의 서모(여)씨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고 난 후 사소한 일에도 자주 놀라고 가슴이 뛰면서 불안증이 심해 약으로 버티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월드타워점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대비 26.8% 늘어난 6,112억원으로 사상 최대였다. 직원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일터가 갑자기 문을 닫게 된 석연찮은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5년 전 다른 곳에서 월드타워점으로 이직했다는 김모씨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겁이 나 대인기피증으로 휴대폰을 꺼놓고 지낸다”고 울먹였다. SK네트웍스 면세점에서 23년 동안 일해 온 김모씨도 “신규 면세점 허가를 늘린다는 소식이 들리긴 하지만 들쭉날쭉한 정책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최근 서울 광장동 SK네트웍스 워커힐 면세점에서 만난 13년 차 직원 박모(여)씨는 “술을 마셔야만 밤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집에서 남편이나 다섯 살 아들과 대화 없이 지낸 지도 너무 오래됐다”며 “열심히 일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꿈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 미처 몰랐다”고 흐느꼈다.
신규 면세점도 콧대 높아진 명품 업체로 ‘골머리’
당국의 조삼모사 면세점 정책은 신규 면세점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 문을 연 신라아이파크면세점이나 한화갤러리아, SM면세점은 물론이고 조만간 개점할 예정인 신세계와 두산 역시 루이뷔통, 샤넬, 에르메스 등 소위 3대 명품 브랜드 유치에 애를 먹고 있다. 신라아이파크면세점 관계자는 “정부가 서울 시내 면세점을 추가로 허용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면서 명품 브랜드쪽에서 계약서 서명을 미루고 있다”고 토로했다. 한화갤러리아측도 “명품 업체들이 필요한 조사를 모두 마치고도 최종 계약은 안 하고 있다”며 “명품 입점 없이 면세점 문을 연다는 것은 팥소 없는 찐빵을 내 놓고 장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면세점 업계가 당국의 조삼모사 정책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반면 이웃 나라들의 면세점 업계는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질주하고 있다. 중국은 2014년9월 하이난(海南)성에 세계 최대 면세점을 연 데 이어 최근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 등에 한국을 모방한 대형 면세점 개장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 관광객이 한국 면세점을 찾아야 할 이유는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일본도 도쿄 번화가인 긴자 일대에만 내년 3월까지 대형 면세점 4개를 열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면세점 사업에 대한 중장기 전략과 목표부터 세운 뒤 체계적 접근을 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안승호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국과 일본 등이 적극적으로 면세사업에 뛰어들며 한반도를 둘러싼 면세 시장이 중대 전환점을 맞고 있다”며 “관광산업 육성과 내수시장 활성화 등 산업적인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국내 면세 시장 전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재경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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