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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이 선 팽나무를 보거든 ‘잃어버린 마을’을 기억하세요

입력
2016.03.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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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으로 사라진 마을 지키는 애잔한 풍경들

제주 중산간 마을 팽나무는 ‘잃어버린 마을’의 징표다. 동광리 삼밭구석
제주 중산간 마을 팽나무는 ‘잃어버린 마을’의 징표다. 동광리 삼밭구석

또 다시 4월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T.S 엘리엇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전후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주 사람들만큼 4월을 잔인하게 여기는 이들이 또 있을까 여겨본다. 제주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사건 때문이다. 제주 4·3특별법은 이 비극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기간 제주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3만 명 내외가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희생자 중에는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8%, 61세 이상이 6.1%이고 여성의 비율도 21.3%에 달한다(제주4·3사건위원회 신고자 기준). 전시가 아님에도 전투능력이 없는 주민들이 이처럼 희생된 사례는 흔치 않다. 물적 피해도 상당해 300여 개 마을에서 2만여 호, 4만여 가옥이 피해를 입었고, 각급학교와 시설이 폐허로 변했다. 당시의 참상을 아직까지 증언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잃어버린 마을’이다.

잃어버린 마을은 당시 마을 전체가 불에 태워진 후 복구되지 않고 폐허로 남거나 훗날 농경지로 바뀐 마을을 이른다. 제주4·3사건위원회 조사에서 ‘잃어버린 마을’은 84개소로 확인됐다. 제주4·3연구소는 제주시 82개소, 서귀포시 26개소 등 108개 마을이 없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산간 마을의 수난은 1948년 10월 제주도경비사령부의 포고문에서 비롯된다.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제주에서 통상 중산간이라 이르는 200~600m 지대는 물론이고, 해안마을을 제외한 모든 마을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어서 그 해 11월 계엄령을 선포한 후, 당국은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총살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15세 이하 어린이의 76.5%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61세 이상 희생자 중에도 76.6%가 이 기간에 화를 당했다.

1954년 4월 1일부로 복귀를 허용하면서 해안마을로 소개됐던 중산간 주민들도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집단희생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상당수 주민들은 원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날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는 이유다.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금악 윗동네 일동이못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금악 윗동네 일동이못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동광리 무등이왓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동광리 무등이왓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상천리 비지남흘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상천리 비지남흘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와흘리 고평동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와흘리 고평동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와흘리 터진물골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와흘리 터진물골

제주의 중산간 마을을 다니다 보면 우람한 팽나무와 대나무 울타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 지역 대부분이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제주에서 팽나무와 대나무는 마을입지와 주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요소다. ‘폭낭’이라 불리는 팽나무가 중앙에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이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팽나무 아래에 돌로 쌓은 대(臺)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이자 마을회관이 들어서기 전 공회당 역할을 했던 댓돌이다.

대나무는 대개 집 뒷부분 우영의 가장자리에 많이 심었다. 우영은 집 주위를 두르고 있는 텃밭을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우영은 각 가정에 부식을 공급하는 곳으로 바로 채취해 먹을 수 있는 채소를 많이 심었다. 특히 배추와 무는 기온이 온화해 한겨울에도 재배한다. 대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도 가정마다 필요한 구덕과 차롱(바구니) 등 죽제품 재료를 자급하기 위해서다. 제주에서 죽제품은 먹거리와 갖가지 용구를 보관하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잔인한 달 4월, 마을이 사라진 중산간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팽나무와 대나무 울타리는 제주의 아픔을 말없이 대변하는 징표다.

강정효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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