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으로 사라진 마을 지키는 애잔한 풍경들
또 다시 4월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T.S 엘리엇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전후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주 사람들만큼 4월을 잔인하게 여기는 이들이 또 있을까 여겨본다. 제주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사건 때문이다. 제주 4·3특별법은 이 비극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기간 제주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3만 명 내외가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희생자 중에는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8%, 61세 이상이 6.1%이고 여성의 비율도 21.3%에 달한다(제주4·3사건위원회 신고자 기준). 전시가 아님에도 전투능력이 없는 주민들이 이처럼 희생된 사례는 흔치 않다. 물적 피해도 상당해 300여 개 마을에서 2만여 호, 4만여 가옥이 피해를 입었고, 각급학교와 시설이 폐허로 변했다. 당시의 참상을 아직까지 증언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잃어버린 마을’이다.
잃어버린 마을은 당시 마을 전체가 불에 태워진 후 복구되지 않고 폐허로 남거나 훗날 농경지로 바뀐 마을을 이른다. 제주4·3사건위원회 조사에서 ‘잃어버린 마을’은 84개소로 확인됐다. 제주4·3연구소는 제주시 82개소, 서귀포시 26개소 등 108개 마을이 없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산간 마을의 수난은 1948년 10월 제주도경비사령부의 포고문에서 비롯된다.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제주에서 통상 중산간이라 이르는 200~600m 지대는 물론이고, 해안마을을 제외한 모든 마을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어서 그 해 11월 계엄령을 선포한 후, 당국은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총살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15세 이하 어린이의 76.5%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61세 이상 희생자 중에도 76.6%가 이 기간에 화를 당했다.
1954년 4월 1일부로 복귀를 허용하면서 해안마을로 소개됐던 중산간 주민들도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집단희생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상당수 주민들은 원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날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는 이유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을 다니다 보면 우람한 팽나무와 대나무 울타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 지역 대부분이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제주에서 팽나무와 대나무는 마을입지와 주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요소다. ‘폭낭’이라 불리는 팽나무가 중앙에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이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팽나무 아래에 돌로 쌓은 대(臺)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이자 마을회관이 들어서기 전 공회당 역할을 했던 댓돌이다.
대나무는 대개 집 뒷부분 우영의 가장자리에 많이 심었다. 우영은 집 주위를 두르고 있는 텃밭을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우영은 각 가정에 부식을 공급하는 곳으로 바로 채취해 먹을 수 있는 채소를 많이 심었다. 특히 배추와 무는 기온이 온화해 한겨울에도 재배한다. 대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도 가정마다 필요한 구덕과 차롱(바구니) 등 죽제품 재료를 자급하기 위해서다. 제주에서 죽제품은 먹거리와 갖가지 용구를 보관하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잔인한 달 4월, 마을이 사라진 중산간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팽나무와 대나무 울타리는 제주의 아픔을 말없이 대변하는 징표다.
강정효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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