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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슈타인 원칙

입력
2016.03.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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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3월 29일

발터 할슈타인(1901~1982). 1950년대 냉전의 전선을 획정하던 시기 서독 외교부를 이끌었다.
발터 할슈타인(1901~1982). 1950년대 냉전의 전선을 획정하던 시기 서독 외교부를 이끌었다.

미국 변호사 제임스 도노번을 소개하며 언급했던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는 동독이 미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용 쓰는 이야기가 작은 에피소드로 끼여 있다. 도노번이 활약했던 1957년은 서독의 ‘할슈타인 독트린’ 즉 동독 불승인 원칙이 확고하던 때였다. 서독 외무차관과 유럽공동시장(EEC) 초대 위원장을 지낸 발터 할슈타인(Walter Hallstein)이 1982년 3월 29일 별세했다. 할슈타인 원칙의 그 할슈타인이다.

1955년 9월 서독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는 의회 연설에서 “서독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제3국이 동독과 공식적 외교관계를 맺을 경우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해 12월 본에서 열린 대사회의에서 서독 외교부는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제3국에 대한 제제방안을 마련했다. 우선 대사를 소환하고 외교사절단 규모 등 교류 범위를 축소한 뒤 변화가 없을 경우 단교도 불사한다는 거였다. 물론 회의도, 내용도 비공개였다.

57년 10월 유고슬라비아가 동독을 승인했고,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와 단교했다. 언론은 ‘동독 불승인’을 ‘동독 승인=서독 단교’로 판단,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 없는 그 정책에 ‘할슈타인-그레베 독트린’이란 용어를 붙였다. 당시 서독 외교부는 장관 없이 수상- 차관 체제로 운영됐고, 그레베는 외교부 정치국장이었다.

냉전기 할슈타인 원칙은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1969년 취임한 사민당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으로 효력을 다했다. 브란트는 그해 10월 시정연설에서 ‘1민족 2국가’원칙을 표방하며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할슈타인 원칙의 동양 버전이 중국의 ‘하나의 중국’노선이다. 중국 대륙의 합법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일하므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2년 한국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 당시 중화민국 대사 진수지(金樹基)는 서울 중구 명동의 중화민국 대사관(현 중국 대사관)의 청천백일기를 하강한 뒤 기자회견에서 “오늘 우리는 대만 국기를 내리지만 이 국기는 우리 마음 속에 건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한국서 활동해온 대만출신 가수 쯔위가 최근 한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태극기와 청천백일기를 함께 흔들어 대륙의 심사를 틀어지게 하고, 이어 나온 미숙한 수습책이 대만ㆍ한국인의 묵은 소회까지 들쑤신 일이 있었다. 적의 친구는 적이라는 할슈타인 원칙은, 일국의 국제법적 지위와 무관하게, 보다 앞서고 보다 오래 가는 감정의 서슬로 사사화(私事化)하고 내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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