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여당 본격 권력투쟁 막 올라
김무성-유승민 동맹 현실화 가능성
대통령 무리수가 정치적 타격 초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친박 좌장으로 불리던 시절 얘기다. 김무성이 기자들에게 “박근혜가 가장 잘 쓰는 말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원칙, 신뢰 아니냐”고 하자 김무성은 “하극상이다. 박근혜가 초선으로 당 부총재를 할 때 선수(選數)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원들이 자기를 비판하니까 ‘하극상 아니냐’고 화를 내더라”고 했다.
김 대표가 하극상의 주인공이 됐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공천 추인 거부는 하극상 중의 하극상이다. 자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선전포고다. 김 대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불안한 동거는 딱 선거 날까지다. 친박은 “선거가 끝나기만 해보라”며 부글부글하고 있다. 여당의 권력 투쟁이 예상보다 빨리 막이 올랐다.
김 대표의 옥새 투쟁 전까지는 박 대통령의 완벽한 승리로 보였다. 눈엣가시 같은 유승민과 그 일파를 당에서 쫓아냈다. 사사건건 대들던 이재오 등 친이계도 궤멸시켰다. 세력 분포에서 친박이 비박을 누르고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했다. 야권 분열은 여론조사에서 파괴력이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장 공천의 역풍을 감안해도 과반수 확보는 땅 짚고 헤엄치기다. 선거 승리의 공은 김무성이 아니라 박근혜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명실상부한 친정체제 완성이 눈앞에 와 있었다.
시나리오는 완벽했고 청와대의 연출도 흠잡을 데 없었다. 한데 막판에 사달이 났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격언을 무시한 게 화근이다. 납작 엎드려 있던 김무성이 후보 등록 마감 초읽기 순간을 노려 기습작전을 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비박계를 대거 학살한 ‘3ㆍ15공천’ 다음날 김무성이 “당헌ㆍ당규 위배”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이한구는 “바보 같은 소리”라고 비아냥댔다. 유승민 지역구 무공천 요구에는 “무공천은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낙천한 유승민계와 비박계를 중심으로 “무대(김무성 대장)가 아니라 무쫄(김무성 쫄병)”이라는 조롱이 공개적으로 표출됐을 때 김무성의 동태를 살폈어야 했다. 내년 대선을 내다보는 김무성이 무기력한 모습으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조급함에 뭔가를 도모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일단 김무성과 적당히 타협을 하기는 했지만 당초 구상이 많이 흐트러졌다. 무엇보다 유승민의 생환이 걱정이다. 총선 직후 벌어질 계파간 전쟁에서 김무성과 유승민의 연대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여권 내 유력 대선주자인 김무성과 전국적 정치인으로 부상한 유승민 사단이 동맹을 결성하면 만만치 않은 세력이 형성된다. 비박계가 개혁보수를 기치로 내걸고 연합세력을 구축하면 당이 쪼개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꼴통보수’와 ‘개혁보수’의 싸움은 보수세력의 대규모 지각변동을 초래하고, 친박은 고립무원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친박과 비박간의 치열한 각축만으로도 박 대통령이 받을 정치적 타격은 막대하다. 여당의 사생결단식 집안 싸움에 임기 말 국정운영이 순조로울 리 만무하다. 정적 찍어내기와 꼼수공천 등 역대 최악의 공천 파동을 통해 대통령의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점도 부담이다. 겉으로는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제 식구 챙기기에 골몰하는 이중적 모습에 적지 않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특정 정당과 일체감을 갖고 자신의 직위에 부여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민 모두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과제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파지도자로서의 대통령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박 대통령의 잘못은 자신을 국민의 대표가 아닌 친박의 보스로 착각하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공천 학살을 당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권력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고스란히 박 대통령에게 돌려주고 싶다.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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