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당무거부와 복귀를 지켜보면서, 우리 정치가 얼마나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는가 새삼 절망했다. 자신이 결정한 비례대표 명단에 대해 당내에서 반발이 일자 “나 없이 당이 제대로 갈 것 같은가”라며 분노를 터뜨렸고, 김해에 칩거하던 문재인 전 대표와 당 비대위원이 부랴부랴 서울 구기동 김 대표 집까지 달려가 노여움을 달래야 했다. 지금 더민주당은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동남풍을 기도하는 제갈량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노심초사하던 촉ㆍ오 연합군의 처지와 흡사하다.
위촉오가 싸우던 시절에서 1,8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나라 모든 영역에서 리더십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지도자는 늘 따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때문에 그의 결정에 순응하는 게 조직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된다’는 패러다임이 머물러 있다. 대통령 말씀을 받아 적기에 열중하는 청와대 참모나 장관, 청와대 의중에 따라 총선 후보를 결정하느라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는 새누리당의 모습을 보면 이런 낡은 패러다임은 여야가 다르지 않고, 기업들도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15, 16세기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유럽 주요 왕실은 움트는 과학자들의 신지식과 탐험가들의 용기에 고무돼 점차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있고 그곳에 가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세상을 알기 위해 모르는 곳을 비워둔 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했고, 그 지도에서 영감을 얻은 수 많은 젊은이들이 지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탐험에 나섰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당시 국부나 기술 수준에서 중국 등 아시아 제국들 보다 열세였던 유럽이 그 후 불과 200여년 만에 전세계에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바로 이런 ‘미지에 대한 자각’이라고 분석한다.
미국의 이라크침공 준비가 한창이던 2002년 2월,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이라크가 테러집단에 대량살상무기를 공급한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추궁하는 기자들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노운 노운스(known knownsㆍ알려진 지식)와 노운 언노운스(known unknownsㆍ알려진 무지)의 구분을 내놓는다. “증거가 당장은 없지만 그건 ‘노운 언노운스’의 영역”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진위를 떠나 그렇게 지식의 범주를 나눠 사고한다는 점에서 럼스펠드는 진정 서구 제국주의의 승계자다.
노운 언노운스 영역을 정복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함께 발전한 현대 자본주의사회 리더십의 핵심이기도 하다. 노운 언노운스를 다루는 리더는 자신보다 많이 아는 참모를 모아 그에게 잘 질문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회의장면을 담은 사진에서 대통령이 말하고 참모들이 받아 적는 모습을 찾기 힘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그에 적합한 사회체계를 만들기 위해 또 한번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에 나서고 있다. 선진국을 모방해 성공하는 노운 노운스 영역에만 익숙한 우리나라 산업화 세대의 성공경험과 연륜은 이런 새 세상에 적응하고 경쟁국보다 앞서 나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더민주는 김 대표의 영입으로 중도성향 산업화 세대의 지지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계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낡은 리더십에 휘둘리는 당의 모습에 실망한 지지자도 많다. 물론 나이만을 기준으로 한물간 산업화 세대로 분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정확하고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다들 군말 말고 따르라’는 식의 당 운영을 보니 김 대표는 노운 노운스의 세계에나 적합한 리더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정치 지도자는 미지의 영역을 정확히 비워놓은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이다. 무엇을 모르는 지 명확히 아는, 그래서 일방적으로 지시하기 보다는 모르는 것을 잘 묻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보고 싶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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