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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오지마을 농사짓는 침쟁이 되다

입력
2016.03.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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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개마을에서 포도밭을 돌보는 신동문. 적자 때문에 일 자체는 농민에게 넘겼으나 포도나무를 정성껏 돌보는 일은 계속 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수양개마을에서 포도밭을 돌보는 신동문. 적자 때문에 일 자체는 농민에게 넘겼으나 포도나무를 정성껏 돌보는 일은 계속 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단양역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인 산비탈을 품에 낀 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가뭄이 유난했다던 올 겨울이 무색하게 풍요로운 수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정취에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안내해준 선생님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강에 물 많다고 좋아하지 마쇼. 신동문 선생의 꿈이 저 강물에 잠겨버렸단 말요. 그는 손을 들어 강 건너 산비탈을 가리켰다. 스키장 슬로프처럼 생긴 꽤 거대한 규모의 경작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신동문 선생이 수양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누에도 치고 나무도 심었던 곳이오. 하지만 신동문이 자신의 말년을 의탁했던 수양개 마을은 풍성한 강물 아래 묻혀 잊힌 지 오래였다. 마치 신동문의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

최인훈의 ‘광장’ 소개한 시인이자 출판인

신동문은 4ㆍ19 혁명을 노래한 시인이자 뛰어난 출판편집자였다. 그는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어 등단한 뒤, 60년대에 활발한 시작 활동을 펼쳤다. 신동문과 함께 신구문화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염무웅은 그를 일러 “1960년대에…혜성과도 같이 빛나는 시인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거니와 4ㆍ19 혁명 때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의 모습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모습을 본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은 아직까지도 4ㆍ19 혁명의 정신을 대표하는 시로 꼽힌다.

동시에 그는 기획출판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그 당시 여러 문학전집을 성공적으로 묶어내며 한국 출판계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출판편집자였다. 또한 월간 ‘새벽’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최인훈의 ‘광장’이 세상의 빛을 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경향신문’ 특집부장 겸 기획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독재정권의 부조리를 꾸짖거나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생생히 전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신동문은 올해 50주년을 맞이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의 제3대 발행인이자 ‘창작과비평사’의 초대 사장이기도 했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해냈던 신동문의 학력은 그러나 ‘고졸’에 불과했다.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중퇴했고 이어 경희대에 편입했으나 건강 문제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의 건강이었다. 어려서부터 폐결핵을 앓았던 그는 병원을 수시로 드나드느라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신동문의 젊은 시절.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동문의 젊은 시절. 한국일보 자료사진

게다가 남편을 일찍 여읜 신동문의 어머님은 신동문이 ‘애비 없는 후레아들’ 소리를 듣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무척 강한 통제를 가했다. 동네 아이들은 물론이고 누이들과도 같이 놀지 못했던 그에게 ‘유이하게’ 허용한 여가생활이 책읽기와 수영이었다. “내가 질식할 듯한 어린 시절의 구속생활에서 숨구멍을 찾았다면 아마 책을 읽는 일, 그 중에서도 소설을 읽는 일이었으리라. 이렇게 소설을 읽는 행위로써 나는 억압된 행동과 감정의 발산을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 수업은 이렇게 창백한 병상에 시든 풀처럼 누워 철저히 독학으로 진행되었다.

런던올림픽 수영 국가대표로 ‘탈조선’ 꿈꾸다

한편 신동문은 바다가 없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쭉 충청도 내륙 지방에서만 살았음에도 수영 실력이 출중했다. 소화불량을 겪고 있던 그가 물에서 놀고 오면 식욕이 왕성해지는 것을 안 그의 어머니가 이를 묵인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수영을 배워본 일이 없었음에도 뛰어난 수영 선수로 지역 사회에 이름을 날렸다.

심지어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수상연맹에서 뽑은 올림픽 출전 후보 선수 10명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신동문에게 올림픽 성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국가대표로 뽑혀 런던으로 갈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도망을 쳐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해야겠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음모를 가슴 가득히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음모’를 너무 열심히 ‘예비’하느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결과 늑막염으로 쓰러지고 만다. 독학으로 배운 그의 수영 실력이 잠시나마 꿈꾸게 해주었던 ‘탈조선’의 희망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4ㆍ19를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정착한 신동문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출판편집자이자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그의 삶은 지식인이라는 자신의 존재 양식을 끊임없이 회의하며 그것과 불화하는 삶이었다. 이는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발화에 가혹한 검열과 탄압으로 맞섰던 박정희 정권의 폭력과 이러한 억압에 누구보다 커다란 환멸을 느꼈던 신동문의 예민한 감각이 더해진 결과였다.

수양개 마을에 남겨진 신동문의 옛집.
수양개 마을에 남겨진 신동문의 옛집.

리영희 필화 사건으로 수양개 마을에 가다

1975년 신동문은 ‘창작과비평사’의 사장직에서 물러나 단양 수양개 마을로 귀촌한다. 1975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린 리영희의 글로 인한 필화사건에 휘말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절필을 강요 받고 그 결과 낙심하여 귀촌하였다고 흔히들 알고 있지만, 신동문의 귀촌은 그렇게 수세적인 내쫓김은 아니었다. 물론 중앙정보부에서 겪은 고초가 그에게 커다란 환멸을 선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의 귀촌은 그보다 더 오래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그는 1962년에 이미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마을 부근의 임야를 매입해 틈틈이 개간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의 심경은 1967년에 발표한 ‘내 노동으로’라는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중략)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중략)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에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이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중략)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한 것이 언제인데.”

신동문의 귀촌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한 결심’을 실천에 옮긴 일이었다. 그는 훗날 수양개 마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양개는 문명 이전의 오지마을이었어. 요즘의 이장이나 반장 하는 식으로 꽉 조여진 생활이 아니었고, 군대식의 효율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지도 않았어. 그런데도 마을이 조화롭고 순박했어.” 박정희 정권의 타율적인 농촌 근대화에 맞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농촌 공동체를 지향했던 신동문에게 수양개 마을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맑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농촌 공동체가 진정으로 자율성을 지니려면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어야 했다. 그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양잠을 치고 과수원을 꾸린 것은 이와 같은 판단 때문이었다.

신동문의 수양개마을에 있는 세칸짜리 침방. 침을 놔주되 사례비 대신 노래를 부르게 한다. 문앞에다 ‘침방, 노래방’이란 간판도 붙여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동문의 수양개마을에 있는 세칸짜리 침방. 침을 놔주되 사례비 대신 노래를 부르게 한다. 문앞에다 ‘침방, 노래방’이란 간판도 붙여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동으로 굳은 농부 어깨에 놓은 침

하지만 수양개 마을에서 신동문의 ‘본업’은 농부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 침술원을 열고 “침쟁이”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가 침술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자신의 허약한 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 삼에 직접 침을 놔 가면서 침술을 오로지 독학으로 익혔다. 이를 위해 한방침술서는 물론이거니와 동양의 여러 전통 침술서적들을 두루 섭렵했으며 중국의 마오쩌둥이 대장정 당시에 여러 병사들의 병을 낫게 한 경험을 되살려 펴내게 했다는 침술서적 한 권을 어렵게 구해 탐독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료로 침을 놔주었다.

소문이 퍼지자 신동문의 침술원 앞에는 수십, 수백 명이 모여들어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먼 곳에서 찾아와 침술원에서 먹고 사는 요양환자들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 대신 농사의 일손을 거들게 하거나 노래 한 자락 즐겁게 부르게 했다. 덕분에 수양개 마을에는 각양각색의 환자들이 부르는 흥겹고도 구슬픈 노래들이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그의 침술원은 서로 몸의 아픔을 덜고 마음의 위안을 나누어 가지는 풍요로운 공동체의 구심이 되었다.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수양개 마을이 물에 잠기고 난 뒤에도, 신동문의 침술원은 계속해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울고 웃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였다.

농민의 몸을 어루만지며 키운 공동체의 꿈

단양역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신동문의 집은 폐허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돌보지 않는 듯 했다. 신동문의 삶은 그렇게 잊혀 오늘도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만약 신동문이 침 대신 펜을 계속 잡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꿈이 어린 터전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홀로 터득한 침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치 정직한 삶과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은 도회의 가냘픈 펜이 아니라 아픈 농민들의 육체를 어루만지는 침으로만 꿈 꿀 수 있다는 듯이. 비록 도시의 독자들은 잃었을지언정 농촌의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기거할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 편이 더욱 행복하다는 듯이.

문학과 수영, 침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에 꿈과 희망을 불어넣었던 그 모든 것들을 그는 스스로 배우고 터득했다. 그리고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문학을 자아라는 좁은 실존에 가두지 않았고 역사와 세계를 향해 열어놓았으며 어렵게 터득한 침술을 가난한 농민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바쳤다. 비록 신동문의 삶은 무너진 그의 집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갔지만 독학과 나눔의 정신은 그 폐허에서도 우뚝 솟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 주신 ‘신동문 평전’ 저자 김판수 선생께 감사 드립니다.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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