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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김종인, ‘경제민주화 전도사’와 ‘독불 장군’의 엇갈린 평가

입력
2016.03.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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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닷컴은 이슈에 오른 인물을 선정해 과거 다양한 행보를 분석하고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인물탐구 시리즈, ‘인물 360°’를 26일부터 매주 토요일에 연재합니다.

'경제민주화 전도사'와 '독불장군'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김종인.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제민주화 전도사'와 '독불장군'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김종인.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2년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1등 공신이 이번에는 제 20 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반대편에 서서 제 1 야당의 대표가 됐다. 한국 정당사에 유례없는 일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다. 올해 우리 나이로 77세인 이 노정객은 다른 정치인들과 다르게 독특한 길을 걸으며 상반되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40여년 전 강도 높은 재벌개혁 정책을 실행하면서 ‘경제민주화 전도사’ 로 꼽혔다. 반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위임된 전권을 최대한 행사하며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다 보니 러시아 전제군주라는 뜻의 ‘차르’, ‘점령군 사령관’ 등 독선적인 별명도 따라 붙었다. 특히 신념을 관철한다는 이유로 수 차례 당적을 바꾼 행보도 자주 도마에 오른다. 그만큼 다양한 모습을 보인 그의 궤적을 통해 논란이 많은 정치인 김종인을 살펴 봤다.

1987년 11월 10일 민정당 노태우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경제공약을 밝히는 자리에 당시 경제 참모였던 김종인(뒷줄 맨왼쪽) 대표가 함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11월 10일 민정당 노태우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경제공약을 밝히는 자리에 당시 경제 참모였던 김종인(뒷줄 맨왼쪽) 대표가 함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상 가장 ‘좌파적인’ 경제 관료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지 않으면 나중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집니다. 대통령이 힘 센 거 같지만 나중에 재계의 힘이 세지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재계가 어떤 정책이 시장경제 논리에 반한다며 헌법재판소에 가져가면 언론이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은 재계의 편을 들 것입니다. 여론 형성층이란 교수들도, 위헌 소송을 맡은 보수적 판사들도 결국 위헌이라는 결론을 낼 것입니다.”

김 대표는 2013년 10월 ‘종로포럼’에 초청받은 자리에서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제119조 2항)을 넣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에도 재계의 반발이 거셌지만 이런 논리로 군부 정권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하고 관철시켜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불린다. 국가의 통제를 통해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케인지언 계열의 경제학자다. 독일의 뮌스터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유럽파’라는 점도 관련 있다.

그렇다고 이론만 떠든 학자는 아니다. 그의 오랜 정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정부의 경제 정책에 직접 관여한 때가 있다. 1990년 노태우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며 역사에 남을 ‘사고’를 쳤다.

“4월 30일 김종인은 플라자 호텔에서 10대 그룹의 기획조정실장을 불러 대통령의 노여움을 전달했다. 보유 부동산의 일부를 자진 매각해 달라고 요구했다. 10대 그룹의 전체 보유 부동산이 8,000만평 가량 되니까 그 10분의1인 800만평을 팔아야 한다는 주문이었다”(‘한국현대사 산책’ 中)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로 매각하는 ‘5ㆍ8 조치’는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재벌 규제였다. 그는 이 정책으로 기록적인 폭등을 거듭하던 부동산 시장을 단번에 안정시켰다. 나아가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개발이익을 불로소득으로 환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토지공개념 법안을 추진했다. 그 바람에 노태우 정권은 일부 경제학자들로부터 가장 ‘좌파적인’ 경제정책을 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 8월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당사에서 대소(對蘇)수교교섭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던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의 예방을 받고 양국간 수교시기 및 경협문제 등에 대해 설명을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0년 8월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당사에서 대소(對蘇)수교교섭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던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의 예방을 받고 양국간 수교시기 및 경협문제 등에 대해 설명을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제민주화 전도사’의 양면성

“김종인 위원장은 권력에 기대 민정당 11대 전국구, 민정당 12대 전국구, 민자당 14대 전국구, 새천년민주당 17대 비례대표 등 지역구가 아닌 전국구, 비례대표로만 네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다. 역대 정권마다 정부 요직에 올랐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참모, 안철수 의원의 정치 멘토 그리고 이번에는 문재인 대표의 선거 총책까지, 김 위원장의 갈지자 행보는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다.”

새누리당은 김 대표가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된 다음날인 1월15일 논평을 내놓았다. 새누리당 논평처럼 그는 부평초처럼 여러 당을 떠돌았다.

다만 노태우 정권 이후 정부 요직에 등용된 적은 없다. 재벌 개혁을 단행한 일이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앞길을 막은 탓이다.

5ㆍ8조치 이후 재계 호사가들은 김 대표를 ‘꼴통 정치인’으로 분류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장으로 그와 부딪혔던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김종인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치를 떨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참여정부 시절 초대 경제부총리 물망에 올랐으나 김진표 부총리로 낙점된 것도 재계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전도사라는 강성 이미지가 꼭 독이 된 것 만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론과 실천력을 겸비한 유일무이한 정치가로 인정 받으며 집권 초기에 재벌 길들이기를 벌인 역대 정권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경제민주화 실현에 강한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세력과도 손을 잡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여러 정당을 옮겨다닌 종잡을 수 없는 갈짓자 행보는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가 드러난 단적인 사례가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 대표는 한 방송 대담 프로에 나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른 후보를 대통령 만들려고 나와 있는 사람이지만 대선이 끝나고 나서 (혹시라도 문재인 후보가 당선돼) ‘이러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신의 머리가 필요한 것 같으니 도와 달라’ 그러면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새누리당의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박근혜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 상황에서 문 후보 측이 당선돼도 도울 의사가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2012년 9월5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기구 임명장 수여식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김종인 국민행복특위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2012년 9월5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기구 임명장 수여식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김종인 국민행복특위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어딜 감히” 전매 특허가 된 당무 거부

“지난해 12월부터 문 대표가 귀찮을 정도로 부탁했다. 절대적 전권을 주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했다” (중앙일보 1월14일 인터뷰 중)

김 대표는 더민주당의 비대위 대표 수락 조건으로 문재인 전 대표에게 전권 행사를 요구했다. 당초 문 전 대표는 호남 정치 복원을 위해 천정배 의원과 김 대표의 공동선대위 체제를 추진했지만 김 대표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과거에도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전권을 요구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도 경제 관련 장관을 모두 선임할 수 있는 전권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 당해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밀려난 전력이 있다.

정가에서는 김 대표가 그토록 전권에 집착하다보니 정치인이라기 보다 전통적인 고위 관료에 가깝다고 본다. 관료 조직은 위에서 결정을 내리면 일사천리로 이를 실행한다. 독단적인 결정이어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구조다. 그가 두 달 만에 더민주당의 체질개선에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던 비결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권한이 위협을 받을 때 보이는 김 대표의 태도다. 최근 비례대표 선정과 관련해 벌인 당무 거부 사태에서 알 수 잇듯 그는 권한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반발했다.

“김 위원장은 자리를 맡으면 전권 행사를 요구하는 스타일이어서 기존 조직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퇴 카드 등을 던져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에서 김 대표와 함께 일했던 인사가 언론(조선일보 1월16일자)에 전한 평가다. 당무 거부라는 벼랑 끝 전술을 썼던 것이 처음이 아니란 것이다.

2012년 대선 때 무려 다섯 번이나 당무 거부를 선언한 전례가 있다.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 후인 2004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돼 부대표 직함을 맡았지만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그때도 당무를 거부했다.

그래서 정계에서는 그를 차르나 마키아벨리에 곧잘 비유한다. 반대파를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내기보다 이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점에서 제왕적 군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모 정치인은 “머리는 경제민주화를 중시하지만 몸은 구시대적 리더십에 갇혀 있다”고 주장했다.

1월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4차 중앙위원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1월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4차 중앙위원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경제민주화’ 빼면 뭐가 남지?

“민주당은 17대 총선에서 탄핵을 주도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민주당이 옳았다는 게 이번 선거 결과로 드러났다. 이번 선거 결과는 지난 ‘탄핵의 재확인’이다. 국민들은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김 대표는 2006년 7ㆍ26 재보선에서 조순형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폴리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같이 밝혔다. 비록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공감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 보여준 입장과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참여에 대한 석연치 않은 해명 등은 그의 정치적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제시하며 정권 탄생에 기여했지만 대선 이후 서로 등을 돌렸다.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사실상 팽(烹)을 당했다고 본다. 그렇다 보니 정치 권력의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 얼굴마담일 뿐이란 혹평도 나왔다.

최근 김 대표가 논란을 부르며 비례대표 2번을 요구한 것도 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법정관리인’ 역할을 넘어 총선 이후에도 직접 정권 창출에 관여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정권 교체를 위해 직접 당권을 쥐고 더불어민주당의 ‘당 정체성’을 이른바 ‘운동권 정당’ ‘친노 정당’이 아니라 ‘합리적 보수 정당’으로 바꾸려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김 대표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4ㆍ13 총선이 끝난 후에야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상 시국’이 아닌 평시에도 지금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고수한다면 총선 이후 그에 대한 반발이 커져 입지가 불안해질 가능성도 있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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