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 갔더니 PD가 엉뚱한 일을 시켰다. 소설 낭독 중 남자 파트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것. 정형화된 성우 발성은 내키지 않던 참에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남녀 사이 묻어둔 마음을 조심스레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체크해둔 부분만 감정 살려 읽으면 되는 일. 쪽대본 받고 바로 연기해야 하는 탤런트가 된 기분이었다. 만사 심드렁하고 마음 따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는데, 큐 사인이 들어오고 연기(?)를 하다 보니 죽어있던 감정의 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내 말도 내 감정도 아니지만, 잠깐이나마 이입이 되어 내 목소리로 읽어 내리는 순간, 더께가 진 감정의 굳은살 안쪽의 생각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신기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소설 속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굳었던 마음에서 절로 많은 말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녹음이 끝나고 본방으로 들어갔다. 준비하지도 않은 말들이 솔직하게 풀려 나왔다. 예상치 못한 일. 많이 피곤한 상태라 별 의욕이 없던 상황이었는데, 방송이 끝나자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무감과 무심의 껍질 속에 오래 갇혀있었다는 자각이 놀랍도록 투명했다. 그 중 한 구절을 소리 내 곱씹으며 방송국을 나왔다. “사람은 혼이 빠져 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혼을 곡진하게 여미지 못해 죽은 말들이 감정의 각질로 겨우내 쌓여있었던 걸까. 봄볕이 맑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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