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이나 스마트폰 문자에는 감성이나 영혼을 찾기 어렵지만 손으로 쓴 편지에는 정성과 진실한 마음이 담깁니다. 따뜻한 진심이 전달되는 것만 봐도 행복해요.”
4년째 손편지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근호(59) 손편지운동본부 대표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24일 서울 숭인동의 주로 50~70대 만학도들의 배움터인 진형중고등학교에서 만난 그는 올해 처음 지정된 서해수호의 날(3월 넷째 주 금요일)을 맞아 국군 장병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 평균 연령이 60대인데 이들이 부모 또는 조부모의 마음으로 쓴 편지가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해수호의 날은 제2연평해전, 천안함피격사건, 연평도 포격도발 등으로 희생당한 장병들을 추모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수호 의지를 다지기 위해 지정됐다.
평생교육시설학교인 진형중고교는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1,200여명 전교생이 서해 최북단 해병대 6여단 장병에게 편지를 쓰는 행사를 진행한다. 이 대표가 학교를 찾은 이날 오전에는 중학교 1학년 1반 40여명의 만학도 학생들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둘째 아들을 군에 보낸 박연화(53)씨는 “아들에게 쓰는 것처럼 사랑을 담아 편지를 썼다”면서 “손으로 직접 쓰니 진솔하게 마음이 담기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근호 대표가 손편지의 힘을 느끼게 된 건 5년 전 12년간 일궈온 사업을 가족에게 맡기고 1년간 강원도에서 칩거하면서부터다. “54세가 지나면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동기가 됐다. 암에 걸린 지인과 손편지를 주고받다 상대는 물론 자신도 치유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진심이 담긴 답장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대표에게 손편지는 마음을 따뜻하게 지펴주는 ‘영혼의 연탄’이다. “현대사회는 속도와 경쟁에 빠져 있어요. 하지만 느린 속도로 살아야 주변 환경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배려와 용서, 나눔의 문화도 생길 수 있습니다. 더디고 느리지만 손으로 쓰는 편지가 시대의 감성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 운동을 실천하게 됐습니다.”
이 대표는 치유와 소통이 필요한 현장에 손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사태 때는 경기 양평군 양서초등학교와 강원 철원군 철원초등학교 학생들이 쓴 감사의 편지를 국립의료원과 동탄성심병원의 의료진에게 보냈다. 비무장지대(DMZ) 지뢰 폭발 사고로 부상 당한 군인들에게도 초등학생들이 쓴 위로의 편지를 전달했다. 지역 갈등을 해소하고자 영호남 어린이들이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운동을 시작했고, 층간 소음으로 갈등을 겪는 가정이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이 대표는 손편지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졌던 경험이 있는 그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단원고와 분향소, 집회 현장에서 노란 색종이를 나눠주며 편지를 쓰게 했다. 그는 “내가 이 일을 하도록 하늘이 아들을 잃는 고통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을 다니며 하는 손편지 쓰기 운동의 모든 비용은 이 대표가 부담한다.
5월에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소록도 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손편지 쓰기 행사를 열 예정이다. 세계 각국의 우체통을 전시하는 손편지박물관을 만드는 것도 추진 중이다. 손으로 쓴 편지 한 장이 뭐가 대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의 준비한 대답은 단호하다. “손수 편지를 쓰는 사람의 모습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편지를 쓸 때만큼은 순수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손편지는 이 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명약입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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