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직원 실무교육 부족 탓
식물인간 본인이 방문하라거나
후견인 필요 없는데 선임 요구 등
자의적 판단ㆍ인터넷 검색에 의존
“장애 정도별로 매뉴얼 세분화해야”
2009년 호주 유학 중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김모(31ㆍ여)씨는 소송 끝에 약 20억 원의 정부 손해배상금과 장애인지원금을 받았다. 이후 딸을 국내로 데려온 김씨 어머니는 2014년 법원 심판을 거쳐 김씨의 ‘성년후견인’이 됐다. 문제는 배상금을 받기 위해 김씨 명의의 통장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모든 시중은행을 찾아갔지만 “김씨 본인만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며 거래를 거절당했다. 어머니는 지난해 호주정부가 제시한 기한을 넘긴 뒤에야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해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장애인 지원책으로 도입된 성년후견제가 대다수 금융기관에서 오히려 장애인의 손발을 묶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금융권의 이해 부족 탓에 장애인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경제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년후견제는 고령이나 정신적 제약으로 재산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2013년 7월 도입됐다. 기존 금치산ㆍ한정치산제가 당사자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장애인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후견인이 재산관리 법률 행위를 보조하는 제도다.
은행들도 법률 개정에 맞춰 내규를 손질했다. 하지만 구색만 갖춘 정도다. 대다수 은행은 지적장애인이 은행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금융업무 범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실무교육이 이뤄지지 않아 장애인의 권리가 외면당하기도 했다. 성년후견제 중 한 종류인 특정후견을 받는 지적장애 3급 김모씨는 지난해 11월 체크카드를 만들려 후견인과 함께 서울 A은행을 찾았다가 “성년후견을 받고 있는 지적장애인에게는 체크카드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씨처럼 특정후견을 받는 장애인은 계약 체결 등 법률행위에만 후견인의 도움이 필요할 뿐, 체크카드 발급 같은 일상업무는 혼자서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데도 은행 직원 착각으로 졸지에 금융거래가 제한된 것이다.
실제 확인 결과 국내 시중은행과 특수은행 3곳 모두 성년후견에 관한 별도 교육 없이 창구 직원 개인의 판단에 맡기고 있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23일 “1년에 두 차례 실시하는 직무교육에서도 장애인 부분은 따로 교육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직원들이 전산망 검색을 통해 내용을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은행에서는 성년후견인이 필요 없는 지체장애인에게까지 후견인 선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해 4월 B은행 직원은 지적 능력에 전혀 문제가 없는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성년후견인을 요구했다 반발을 샀다.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이유였는데 이런 자의적 판단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이미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팀장은 “겉모습만 보고 의사능력 유무를 판별하는 것은 권한을 남용한 권리 제약”이라고 비판했다.
은행들의 부당한 행태는 성년후견제 취지를 오해한 데에서 비롯됐다. 은행 측은 “장애인 명의나 계좌가 범죄에 악용될 경우에 대비해 거래 안전을 지키려는 목적”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정작 지적장애인에게 허용되는 일상적 금융거래도 후견인이 개입되면 은행이 우왕좌왕하며 거부하기 일쑤다. 장애인 관련 소송과 자문을 해온 김용혁 변호사는 “장애인의 권리 제약을 최소화한다는 성년후견제의 본질을 은행들만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한두 쪽에 불과한 은행 지침을 보완하고 직원 교육을 강화하는 일도 시급하다. 호주유학생 김씨의 성년후견 심판을 도운 최재훈 법무사는 “장애 정도가 개인마다 다른데도 제도 소개 정도에 그친 현행 지침으로는 일선 창구 은행원들이 일률적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다”며 “은행 직원들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게 세분화한 매뉴얼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지연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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