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딸아이는 일년 내 자기 생일을 손꼽는다. 몇 달 전부터 누구를 초대할지 어떻게 놀지 궁리하느라 바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생일이 그리 좋을까’ 웃음이 나온다. 전남의 완도에 날마다 다시 태어난다는 예쁜 섬이 있다. 고금 약산 금일 청산도에 둘러싸여 있는 생일도다. 이름의 한자도 ‘生日’ 그대로다. 섬의 항구에 들어서면 대합실 위의에 4단 케이크 모형이 반겨주는 곳. 지난해 전남도 가고 싶은 섬 사업에 선정돼 이제 막 관광에 눈을 뜨기 시작한 섬이다. 꼭꼭 숨겨뒀던 비경을 자원화해 이제 관광의 섬으로 새로 태어나려는 생일도를 찾아갔다.
우뚝 솟은 다도해 최고의 전망대
생일도는 화산섬마냥 비교적 매끈한 원모양으로 생겼다. 이 생일도 한가운데 솟은 백운봉의 높이는 483m. 섬의 규모 치곤 꽤나 높은 산을 이고 있다. 완도의 상황봉(644m)에 이어 완도에선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지역에선 상황봉이 완도의 백두산이라면 백운봉은 완도의 한라산이라며 귀하게 대접한다. 주변의 섬들은 우뚝 솟은 생일도를 바라보고 생일도는 그 주변 섬들을 아늑한 시선으로 내려다 본다.
생일도의 첫 코스로 다도해 전망대인 백운봉으로 잡았다. 산의 7부 능선까지 임도가 닦여있다. 산 중턱에 있는 학서암을 잇는 길이다. 작은 암자지만 3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웃 금일도 등엔 사찰이 없어 주변 섬들로부터 꽤 많은 신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길을 안내한 황대하(43) 생일면 청년회장은 예전 초파일이나 동짓날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했다. 인근 섬에서 온 신도들 수백 명이 보따리를 이고 줄지어 산을 올랐다는 것. 절집의 좁은 마당은 드넓은 바다의 장쾌한 풍광을 품고 있다.
학서암에서 산길을 타면 백운봉 정상으로 오른다. 길의 경사가 급하지 않아 쉽게 걸음을 옮길 수 있다.
‘완도의 한라산’ 전망다웠다. 동서남북 서로 다른 느낌의 다도해 그림이 그려진다. 동으로는 금일도를 필두로 금당 거금 섭도 초도 등 다도해 섬무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듯한 모양이다. 남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간결하면서도 우아하다. 용출리 해안가 가까이 있는 도룡량도 뒤로 소덕우도 형제도 덕우도 등이 나른한 봄바다 위로 점점이 이어진다.
도룡량도는 용이 승천했다는 섬. 80m 높이인 섬의 정상엔 수직으로 커다란 굴이 뚫려있다. 이 굴은 섬의 옆면에 뚫린 바다동굴과 이어졌다. 섬의 꼭대기와 바다가 ‘ㄴ’자 터널로 연결된 모양이다. 황씨는 “섬 옆면의 바위가 파도에 뚫린 뒤 섬 중앙의 흙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지만 생일도 주민들은 용이 승천한 곳이라 신성시 여겼다. 바로 앞 두 개의 마을도 용이 나왔다고 용출리, 용굴 앞이라고 굴전리란 이름이 붙여졌다.
도룡량도 뒤로 보이는, 앙증맞은 고래를 닮은 섬은 소덕우도다. 하얀 등대가 마침 고래의 눈 부분에 서있어 더 고래처럼 보인다.
신령함 가득한 마방할머니 당숲
백운봉을 내려와 찾아간 곳은 서성마을 마방할머니 당집이다. 과거 제주도의 말을 싣고 올때 잠시 말의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이 섬에서 쉬었다 갔다고 한다. 그 말을 지켜온 영적 존재인 마방할머니를 지금껏 모시고 있는 것. 주민들은 매년 음력 1월 8일부터 당제를 지낸다. 보통 사흘, 길면 닷새 이상 진행되는 큰 행사다. 여전히 당주로 정해지면 1년간 동침을 금하고 제 지내는 날이면 새벽 차디 찬 개울물에 목욕재계를 한 뒤 음식을 준비한다고. 주민들은 유촌리앞 노거수인 느티나무 등 섬의 12 당신을 돌며 제를 올린다.
마방할머니 당집 뒤에 펼쳐진 당숲은 섬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공간이다. 나무를 베는 것은 물론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당제를 지낼 때만 그 바닥의 가지들을 정리한다고. 황씨는 “40~50년 전 누군가 당숲의 나무를 잘라낸 뒤 금일도로 고구마 팔러 갔던 배가 돌아오는 길 뒤집혀 십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신령스럽고 어둑한 당숲에서 나오는 길, 밭마다 녹색의 그물이 펼쳐져 있길래 물었더니 다시마 건조장이란다. 이 섬은 전국에서 손꼽는 다시마 생산지다. 생일도 다시마는 두껍고 잘 변질되지 않는다고 ‘철갑다시마’로 불린다. 김을 양식하다 다시마로 바꾼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시마 덕에 섬에 큰 돈이 돌기 시작했고 객지에 나가있던 젊은 층들도 많이 돌아왔다. 다시마는 5~7월 집중 수확해 한여름 건조장에서 말려진다. 채취부터 건조까지 오로지 손으로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돈 때문에 한다지만 다시마 때문에 쉬지도 못한다고 푸념이다. “다시마가 왜 다시만지 아남? 다시는 하지 마라, 그래서 다시마라네.”
벼랑을 따라 동백을 따라 최고의 트레일
섬의 해안을 따라 일주도로가 이어지다 중간에 끊긴 구간이 있다. 금곡마을에서 용출마을까지의 벼랑이다. 급경사라 공사가 쉽지 않아 중단된 구간인데 지금은 그렇게 남겨진 덕에 보물이 된 곳이다. 생일도 최고의 절경을 지닌 트레킹 코스 금머리갯길이다.
금곡해수욕장 뒤편으로 길이 시작된다. 산에서 흘러내린 거대한 돌무더기인 너덜지대 옆으로 동백 수백 그루가 군락을 이뤄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동백의 숲길에는 움푹 들어간 백사장을 스피커 삼아 더욱 웅장해진 파도소리가 울려 퍼진다.
밤새 내린 비로 길바닥엔 동백이 많다. 벌어지지도 못하고 똑 떨어진 애기 봉오리부터 농염하게 꽃잎을 벌린 다 익은 동백까지 비에 흠뻑 젖어 땅 위를 뒹군다. 붉은 양탄자길이 오래 이어진다. 행여 그 꽃을 밟을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한참을 붉은 정염에 취해 걷다 보면 하늘이 열린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 큰 파도가 부딪는다.
곶처럼 튀어나온 칼바위가 저 아래다. 칼바위는 섬에서 손꼽히는 낚시포인트. 꾼들 덕에 내려가는 길이 잘 닦여있다. 칼바위 인근에서 올려다 본 벼랑의 풍경은 장엄하다. 태백산 주목을 닮은 고사목들이 기암 위에 그대로 굳어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칼바위에서 전망이 끝내주는 화장실을 발견했다. 낚시꾼들을 위해 바위 위에 만든 변기 하나. 가려주는 것 하나 없지만 그래서 파도와 기암이 빚어내는 절경 그 어떤 것 하나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올라와 벼랑길을 걷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기자기했다가, 웅장했다가, 신비로운 풍경들이 잇달아 튀어 나온다. 황홀한 걸음이다. 생일을 맞는 기쁨 이상으로 생일도 비경과의 만남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완도=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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