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맛 가고 날씨도 맛 가고 한마디로 맛 간 세상이야.’
SBS 주말극 ‘그래, 그런거야’의 김수현(73) 작가는 극중 여기저기 오지랖 넓은 이모 숙경(양희경)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상스러운 게 싫어 막장 드라마는 안 쓴다’던 꼬장꼬장한 노(老)작가의 눈에도 대한민국의 현실은 막장과 다름없음이 분명하다.
취업이 아득한 청춘, 반전세도 감지덕지인 예비부부, 자녀계획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맞벌이 부부까지. 과거 장애아(‘부모님 전상서’ㆍ2005) 동성애(‘인생은 아름다워’ㆍ2010) 이혼과 재혼(‘세 번 결혼하는 여자’ㆍ2013)이란 사회적 화두를 정면으로 내세웠던 48년 경력의 이야기꾼은 이번 드라마에서도 자신의 문제의식을 원고에 반영했다. 갈등을 풀어놓고 봉합하는 유일한 공간이 가족이라는 점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대중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사회를 향해 던지는 목소리가 산만해졌다는 비판과 함께 김수현 특유의 '가족 만능주의' 역시 이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일 뿐이란 목소리가 높다. 10%에 못 미치는 시청률도 김수현으로선 자존심 구길 만한 수치다. 60부작 드라마가 이제 5분의 1 지점을 넘은 상황에서 김수현의 한계를 논한다면 지나친 시기상조일까. 작가 김수현과 그의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봤다.
강은영 기자(강)=“드라마 작가로서는 드물게 항상 사회적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이번에는 극중 김숙자(강부자)의 셋째 며느리로 나오는 한혜경(김해숙)의 세 자녀들을 통해 ‘남자 신데렐라’와 ‘취포자’(취업포기자), 출산 거부 등 요즘 젊은 층의 고뇌를 다각적으로 다가가려 했다.”
양승준 기자(양)=“주연과 조연을 막론하고 여러 세대와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높게 산다. 최근 종방한 MBC ‘내 딸, 금사월’과 비교해보면 ‘그래, 그런거야’에서 자기 의사를 한 문장 이상의 대사로 내뱉은 출연자 수가 2배 이상 많다. 협소한 인간관계 안에서 극적인 갈등을 이끌어내려다 보면 막장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은데 김수현 드라마에선 작은 배역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전작들에 비해 확실히 떨어지는 것 같다.”
조아름 기자(조)=“예전 작품과 달리 너무 많은 이야기를 어수선하게 늘어놓는 느낌이다. 김수현 특유의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를 기대했는데 실망스럽다. 대가족이란 배경에 맞게 등장인물 수가 많고 이들 각자의 사연을 풀어놓다 보니 에피소드는 많은데 이야기를 하나로 이끌고 가는 핵심 메시지는 없다.”
라제기 기자(라)=“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그 중심에 선 인고하는 여성(며느리)이란 틀은 꿋꿋이 유지하고 있다. 결국 가족이란 테두리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판타지가 있는 것 같다. 현실을 비춰보면 사실 시대착오적인 설정이라고 본다. 다양한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옛날 방식의 가족극을 밀고 나가는 뚝심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작가의 만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조=“밥상 앞에서 단결하는 대가족, 솔직히 지겹다. 물론 이번 드라마에 시아버지 유민호(노주현)와 단 둘이 사는 젊은 여성 이지선(서지혜)이란 독특하다면 독특한 가족관계가 나오긴 한다. 그런데 대중의 공감을 얻기에는 무리수란 생각이 들더라.”
라=“이런 설정도 여성이 결혼을 하면 시댁에 귀속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 질서를 기본적으로 깔고 가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강=“권위적인 할아버지와 그에 맞추는 할머니, 완벽한 며느리 등 전통적인 가족상을 그려 답답하다가도 결혼 시켜달라며 가출하는 막무가내의 예비 손주며느리 등을 등장시켜 세대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갈등이 일어나면 서로 간의 대화법으로 화해도 시도하고. 비현실적일지라도 이런 가족주의가 오히려 반갑고 따뜻하다. 가족끼리 극단적으로 싸우는 막장 드라마보단 낫다.”
양=“물론 이 드라마에도 갈등은 있다. 맞벌이 부부 유세희(윤소이)와 나현우(김영훈)은 아이 출산문제로 크게 충돌한다. 하지만 치정이나 복수로 갈등 자체만 지나치게 부각하는 막장드라마와 달리 김수현 드라마에선 가족 간의 의견충돌이 사회적인 화두를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
조=“시청자들은 이 뻔한 가족극에 염증을 느낀다는 게 문제다. 가족 3대란 비현실성과는 별개로 김수현의 드라마에서 지겹게 봐온 가족 구성에 대한 피로도가 높다. 푸근하면서도 깐깐한 시어머니와 믿음직스러운 살림꾼 며느리, 자유분방하지만 어른에게는 깍듯한 손녀 캐릭터는 이제 지겹다.”
강=“이른바 ‘김수현 사단’의 겹치는 캐릭터와 비슷한 연기는 분명 문제다. 이순재, 강부자 부부부터 아들 송승환까지 예전 드라마 ‘목욕탕 집 남자들’(KBS)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작가가 믿고 기용하는 배우들이라곤 하지만 매번 똑같은 배우들의 똑같은 연기는 반감을 살 수도 있겠더라.”
조=“김수현의 전매특허인 ‘따발총 대사’도 여전하다.”
라=“‘김수현 스타일’이라고는 하지만 젊은 층이 이해하기 힘든 옛날 말이나 연극식 대사가 불편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염천에 손 데여 가며’(몹시 더운 날 손 데여 가며)라는 표현을 얼마나 알아듣겠나. 배우의 연기보다 대사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연기를 못 하는 배우도 제법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양=“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너무 많은 대사를 쏟아내 피곤하다는 네티즌의 반응을 본 적이 있다. 김수현의 잘 바뀌지 않는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하나 아직도 방송국은 그를 원하고 있고 고정 팬도 적지 않다. 다음 드라마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작가의 스타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중독성이 있다. 속 시원한 따발총 대사를 좋아하는 시청자들도 많다.”
라=“종합편성채널인 JTBC에서도 ‘무자식 상팔자’로 10%를 기록했던 걸 감안하면 지금의 한 자리 수 시청률은 분명 저조하다. 화려한 스타 캐스팅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30년 넘게 자기 세계를 지키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인기를 유지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방송작가의 ‘작가주의’를 만들어냈다고 할까.”
강=“초반이지만 시청률도 점점 올라가고 있다. 총 60부작 중 이제 12회가 지났다. 지금은 캐릭터를 잡는 시점이고, 김 작가 특유의 줄거리가 전개된다면 20% 이상도 나올 수 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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