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쿠바에 갈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번은 1990년대 초 아바나에서 열린 세계청년축전에 갈 기회였다. 이 행사는 주로 사회주의 진영과 제3세계 국가들이 주축이어서 멈칫거렸다. 이 행사가 1989년 평양에서 열릴 때는 임수경씨가 참석해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쿠바까지 가는 복잡한 비행과 비자 수속을 준비하다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냉전 종식을 지나 세계화가 한창인 2011년 쿠바를 방문했다. 2011년은 라울 카스트로가 형 피델을 대신해 새로운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지 3년째였다.
필자는 ‘제국주의’ 미국의 앞마당에서 자주의 깃발을 휘날리는 쿠바의 현실이 궁금했고 아바나의 매력도 확인하고 싶었다. 도시유기농업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이 공동소유제 하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플로리다주와 마주한 북부 해안도시에 사는 한인교포 마을을 방문한 일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구한말 불가피하게 이주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차별 속에서 살면서도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동족이지만 ‘조국’으로부터 거의 외면당하고 살고 있었다. 아바나대학교 역사학, 정치경제학 교수들과 나눈 쿠바의 개혁정책과 ‘자주외교’ 노선을 들으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바나 주변 대서양과 카리브해, 그리고 코발트빛 밤하늘도 잊을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쿠바인들의 멋스러움 뒤에 풍족함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었다.
2014년 말 라울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며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결정한 것은 세 가지 배경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국내외적으로 쿠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높은 지지다. 예를 들어 2003년 쿠바 유권자들의 97%가 자신들의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했다. 그에 앞선 1998년 유엔은 미국이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중단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했다. 두 번째는 쿠바 정부가 안정적인 정권 승계를 하면서 경제개혁을 점진적이지만 비가역적으로 추진해간다는 입장이다. 성장을 통해 분배의 파이를 늘려가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제재 중단은 필요조건이고 미국과의 전면적인 정치경제 교류는 충족조건이다. 셋째, 관계정상화에 미국의 호응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향적인 대외정책관이 작용했다. 중남미에 대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가치가 높아지는 추세 속에서 미국의 선점전략이 가동된 측면도 있다. 이를 라울이 놓치지 않은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절대 다수인 쿠바인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면도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촉진했다. 쿠바계 미국 대학생인 펠리스 고로르도는 작년 항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를 모시고 아바나를 다녀온 것을 마지막 효도로 생각하고 있다. 고인이 되신 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는데 평소 용서를 강조하셨다고 한다. 마이애미에 살고 있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세대 변화가 일어나면서 쿠바정부에 대한 적대감이 줄고 대신 쿠바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가족, 친인척들과 만나고 그들을 돕는데 더 관심이 많다. 마이애미에 사는 마리아 치우안은 2014년 라울-오바마 정상회담 이후 쿠바를 자주 왕래하며 아바나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오바마는 “우리가 지난 50년간 썼던 제재정책이 우리 국익과 쿠바 국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이번 오바마의 역사적인 쿠바 방문 이후 미국과 쿠바가 전면적인 관계정상화를 이룩한다면 오바마는 닉슨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닉슨과 달리 오바마는 내치와 외교 모두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쿠바에 대한 제재를 완전히 해제하려면 의회의 결의가 필요하다. 또 쿠바 인권문제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라울은 “우리 모두 모든 인권에 부합하기 위해 같이 노력하자”고 응수하고 있다. 이렇게 따스한 평화의 풍경이 한반도에는 언제 올까. 봄은 이미 와 있건만.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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