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범죄 예방도 실적 인정해 줘야
지난 17일 서울의 한 시중은행 A 지점. 20대 남성이 통장을 내밀며 3,000만원 전액을 현금으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직원 K씨는 통장에 여러 차례에 걸쳐 거액이 입금된 것을 보고 이 남성이 보이스피싱 인출책임을 직감했습니다. 시간을 끌며 창구 뒤에 앉아 있는 팀장에게 의심 신호를 보냈습니다. 팀장은 곧장 112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해 남성을 검거했습니다.
비슷한 시각, 경기 B지점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남성이 대포통장으로 의심되는 통장을 내밀며 400만원을 인출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남성은 인출 요구에 앞서 비밀번호를 고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를 눈치챈 은행 직원 S씨가 팀장에게 알렸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이 남성도 현장에서 검거됐습니다.
같은 날 서울 C지점에는 30대 여성이 어린 아이를 안고 찾아왔습니다. 초조한 모습의 여성은 재형저축 1,100만원을 해지하고 전액 현금으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급한 기색으로 누군가와 계속 통화하는 모습에 창구 직원 L씨는 대출사기임을 직감했죠. 이 여성에게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사기사건과 관련한 기사를 보여줬습니다. 이에 고객은 해지를 철회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모두 은행 직원들의 기지로 하룻동안 2명의 보이스피싱 인출책을 잡고, 1명의 피해를 막은 실제 사례들입니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날로 커지는 마당에, 상식적으로 포상도 하고 업무평가에도 가점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다릅니다.
22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현재 모든 시중은행의 성과평가기준(KPI)에는 직원 부주의로 대포통장을 발급하거나 보이스피싱 피해가 발생하면 책임을 물어 감점하는 규정만 있습니다. 반대로 보이스피싱을 예방하거나 적발한 기여에 대해선 개인이나 지점 모두에 가점 조항은 없다고 합니다. 금융 관련 사고가 터지면 벌은 주지만 이를 예방하면 당연한 의무로 여겨 아무런 보상이 없는 셈입니다. 실제 이 은행도 세 직원을 1회성 사내 시상 후보군에 올린 것이 전부라고 하네요.
최근 금융당국은 금융사에 성과주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사 직원의 성과가 꼭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유치 같은 뛰어난 영업실적뿐일까요. 고객에겐 사기 피해를 막는 데 도움을 주는 직원도 무척 고마울 겁니다. 기자의 문제제기에 마침 금감원은 “보이스피싱 사기 예방 실적도 성과평가에 넣도록 유도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이왕이면 상식과도 부합하는 성과주의 확산을 기대해 봅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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