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군다 요.(segunda yo)”
울리 슈틸리케(62ㆍ독일) 국가대표 감독은 통역을 이렇게 부른다. 스페인어로 두 번째 나, ‘분신’이라는 뜻이다. 통역은 단순히 말만 전달하는 감독의 ‘입’이 아니다. 24시간 감독과 동행하며 그 의중까지 정확히 파악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국가대표 전ㆍ현직 사령탑 통역 3명을 동반 인터뷰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인 거스 히딩크(70ㆍ네덜란드) 감독의 통역 전한진(46) 대한축구협회 국제팀장, 조 본프레레(70ㆍ네덜란드)와 딕 아드보카트(69ㆍ네덜란드)ㆍ핌 베어벡(60ㆍ네덜란드) 감독의 통역 박일기(39) 국가대표지원팀장 그리고 슈틸리케 감독의 ‘세군다 요’인 이윤규(31) 국가대표지원팀 사원을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전 팀장과 이 씨는 해외 주재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혔다. 박 팀장은 호주로 어학연수를 가서 배웠다. 영국과 스페인, 브라질에서 거주한 이 씨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도 능통하다.
협회는 히딩크의 통역으로 처음에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려다가 풍부한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내부 직원인 전 팀장을 낙점했다. 박 팀장은 외국인 지도자 강사 통역을 하다가 본프레레 선임과 함께 감독 통역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전 팀장과 박 팀장 모두 처음에 통역을 고사했다. 박 팀장은 “임원 한 분이 술을 사 주며 ‘국가대표 감독 통역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 뿐인 직업이다’고 하셨다.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 수락했다”고 털어놨다. 전 팀장도 “나도 그 말에 설득 당했다”며 웃었다. 이 씨는 정반대다. 그는 2010년 정규직으로 현대자동차에 입사, 경영전략팀을 거쳐 글로벌 인사지원팀에 있다가 ‘박차고’ 나와 계약직인 통역을 자원했다. 주변에서 ‘미친 거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통역은 감독의 비서 업무도 겸해서 늘 비상 대기다. 감독 일정이 없는 날에는 밀린 부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자기 시간이 거의 없는 고된 직업이지만 이 씨는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힘줘 말했다. 전 팀장과 박 팀장도 “과거로 돌아가도 감독 통역은 다시 할 것이다. 힘들지만 보람도 크다”고 했다. 하지만 둘은 “지금 하라면 못 하겠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들은 “통역은 감독의 감정, 축구 철학까지 완전히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전 팀장은 “히딩크가 부임 초기 선수단 미팅 때 제대로 통역을 못 한다며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을 줬다. 특별히 실수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항의했다. 미팅이 끝나고 히딩크가 따로 불러 ‘너를 활용해 나태해진 분위기를 잡으려고 한 건데 그것도 눈치를 못 채느냐’고 질책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고 회상했다. 이 씨는 “슈틸리케 감독은 기자회견 때 원고를 준비하지 않는다. 갑작스런 코멘트를 정확히 전달하려면 왜 그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동의했다. 박 팀장은 “감독이 말하면 선수들은 감독이 아니라 통역 입을 본다. 감독과 말투, 몸짓까지 똑같이 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감독이 협회나 언론 등과 갈등을 빚을 때 다독이고 중재하는 것도 통역 몫이다. 역대 외국인 사령탑 중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본프레레를 ‘모신’ 박 팀장은 아찔한 경험이 많다. 한 번은 본프레레가 박 팀장을 ‘협회 스파이’라고 의심했다. 박 팀장은 “간, 쓸개 다 내놓고 감독만을 위해 살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서글펐다”고 씁쓸해했다. 본프레레가 갑자기 짐을 싸서 숙소를 나가는 바람에 박 팀장이 공항까지 따라가 겨우 데려온 적도 있다.

감독과 동고동락하다 보면 인간적으로 가까워진다. 전 팀장은 “히딩크는 한 번 마음을 연 사람은 끝까지 보호했다”고 고마워했다. 박 팀장은 아드보카트를 못 잊는다. 토요일에 지방에서 열린 K리그를 관전한 아드보카트를 수행한 뒤 밤늦게 함께 서울 호텔로 왔다. 다음 날 오전 출국이라 박 팀장은 파주 국가대표 숙소에 갔다가 새벽에 다시 감독을 데리러 호텔로 와야 했다. 아드보카트는 “내 돈으로 방을 잡아 줄 테니 편하게 자고 가라”며 특급 호텔 방을 예약하려 했지만 박 팀장이 거절했다. 그는 “지방과 파주, 서울을 하루에 오가는 살인 일정에도 그 말을 들으니 피로가 싹 사라지더라”고 미소 지었다. 전 팀장과 이 씨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랫사람들을 잘 배려한다는 평을 듣는다. 이 씨는 “감독님은 ‘너는 내 아들이면서 배우자, 좋은 친구 같은 존재다’고 늘 말씀하신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이세돌(33) 9단과 알파고의 대국으로 큰 이슈가 됐던 인공지능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인공지능이 먼 미래에 국가대표 감독 통역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3명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상황 판단, 분위기 파악, 감독 심리까지 알아채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모를까….”
윤태석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