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3월 21일
헨리 오시언 플리퍼(Henry Ossian Flipper, 1856~1940)는 미국 최초의 흑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다. 1877년 소위로 임관한 뒤 소대를 이끈 첫 흑인 지휘관이기도 하다. 그의 복무 기간은 5년에 그쳤다. 부대장 등이 그에게 누명을 씌워 불명예 제대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오명은 벗은 것은 100년 뒤였고, 1999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그 일에 대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사과했다.
플리퍼는 조지아주 토머스빌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주인은 폰더(Ponder)라는 부유한 노예상인이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났고, 그 해 12월 수정헌법 13조(노예제와 형벌 외 강제노역 금지)가 발효됐으니 태어날 무렵에는 그도 노예였다.
헌법의 기운이 남부의 혈관으로 스미는 데는 물론 꽤 긴 시일이 걸렸지만, 플리퍼는 용케 애틀란타 대학에 입학했고, 1학년 때 주 하원의원 추천으로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흑인 전투 공적을 기려 웨스트포인트는 종전 이듬해부터 흑인 생도의 입교를 허용했지만 졸업한 이는 없었다. 흑인 장교가 백인 병사를 지휘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차별이 당시 교관과 생도들 사이에 있었다. 그의 졸업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임관과 동시에 제10기병대에 배속된 그는 서부 텍사스 인디언 전투에 투입돼 적잖은 전과를 올렸고, 그 해 10월 소대장이 됐다. ‘버팔로 솔저(흑인 곱슬머리를 버팔로 털에 빗댄 말)’라 불리던 흑인 소대였지만, 그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흑인 지휘관이었다.
부대장이던 니콜라스 놀런 대위는 그를 차별 없이 대했다고 한다. 부대 내 차별 역시 심각했다. 놀런의 딸과 친구처럼 지낸 점을 ‘부적절한 행실’로 투서, 모욕적인 조사를 받게 하기도 했다. 부대장이 바뀐 뒤 병참 부서로 전출된 플리퍼는 1881년 7월 부대 운영자금 2,000달러가 빈다는 사실을 안 뒤 즉각 보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동료 장교들이 그를 내쫓기 위해 조작한 일이었고 돈은 나흘 뒤 회수됐지만, 재판부는 82년 6월 그를 불명예 전역시켰다. 전역 후 그는 기술자로, 정치인 보좌관으로 일했다.
1976년 그의 후손들과 지지자들이 재조사를 청원, 신원(伸寃) 작업이 시작됐다. 클린턴이 사과하기까지 그로부터 23년이 걸렸다. 99년 웨스트포인트에는 플리퍼의 흉상이 섰고, 이후 매년 “난관을 딛고 기율과 리더십을 발휘한” 졸업생에게 ‘헨리 플리퍼’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는 1856년 3월 21일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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