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3시, 서울 안암동 고려대 현대자동차경영관. 65학번의 지긋한 노신사부터 13학번의 푸릇한 학부생까지 연령도 다양한 ‘논객’ 50여명이 원형의 대형 강의실을 메웠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논하기 위해 모인 고려대 독서토론회 ‘호박회(虎博會)’의 멤버들이다. 계절별로 연 4회 열리는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연합 독서토론 모임이자 호박회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1965년 신입생 30여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이 독서토론 서클은 고대의 상징인 호랑이에 박학다식한 대학생이 되자는 의미를 더해 ‘호박회’로 명명됐다. 80년대 후반 대학가에 정치 바람이 뜨겁게 불어닥치며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느냐”는 분위기 속에 재학생 모임은 한동안 명맥이 끊겼지만, 창립 이듬해 이미 정회원 119명을 기록하며 고려대 최대 규모 서클을 차지했을 정도로 ‘세’를 떨쳤다. 면면들도 다채롭고 화려하다. 전공과 활동 분야도 문학, 사회학, 경영학, 법학에 의학, 물리학, 식품영양학까지 문ㆍ이과를 망라한다.
통계청장과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지낸 윤영대(사회학과 65학번) 호박회 초대회장을 비롯해 3선 의원을 지낸 이상수(법학과 67학번) 전 노동부 장관, 현 호박회 회장인 최광식(사학과 72학번)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창립 멤버인 황현산(불문과 65학번) 고대 불문과 명예교수, 최동호(국문과 66학번) 고대 국문과 교수, 이두희(경영학 76학번) 고대 경영대학장 겸 경영전문대학원장 등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모임을 이끌고 있다. 소설가 김훈, 동양철학자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도 호박회 출신이다. 학계에 가장 넓게 분포돼 있지만 정계, 행정계, 법조계, 경영계, 문화ㆍ예술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유례 없는 50년간의 독서토론회
50주년사업기념회장을 맡은 황현산 교수는 인사말에서 “원래 대학교가 책 읽는 곳이기 때문에 어디나 독서토론회는 있게 마련이지만, 호박회처럼 50년간 선후배들이 같이 토론하고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온 독서토론회는 흔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크게 발전하는데 호박회 출신들이 역사의 당사자로서 많은 활약을 해왔다”면서 “호박회에서 얻은 지혜로 사회의 여러 가지 일을 해왔던 것은 역사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며, 그것이 이 자리를 자축하고 함께 기뻐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을 이었다.
50주년기념사업회 부회장인 이상수 전 장관은 “학생 시절 고대 최대 이념서클 ‘한맥’의 회장을 하라는 제안이 왔을 때 ‘내가 호박회 회장이라 못 한다’고 했던 일이 있다”며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한맥 회장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만 단호히 거절했을 정도로 호박회에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의 계절을 겪으며 중단됐던 재학생 모임은 이두희 교수와 최동호 교수의 노력으로 2010년 복원됐다. 요즘 대학생들이야 ‘취업 9종세트’의 스펙을 마련하느라 책 같은 건 읽을 틈이 없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모임을 갖는 호박회 재학생 모임은 매번 20~30명이 모일 정도로 출석률이 높다.
식품영양학과 13학번인 재학생 박다현씨는 “전공 외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무엇보다도 깊고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점이 호박회의 매력”이라며 “4학년이라 바쁘기는 하지만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진지한 대화의 재미 덕분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3년째 호박회 활동 중인 경영학과 11학번 김성원씨도 “다양한 생각들을 나누며 책을 읽다 보니 혼자 읽을 때보다 이해가 깊어지는 걸 느낀다”며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책들을 최근 읽었다”고 말했다.
학번도 계급장도 떼고 ‘오직 토론’
분기별로 열리는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독서토론회는 석학 명예교수도, 갓 들어온 학부생도 동일한 발언권을 갖는다. 최광식 전 문체부 장관은 “고대답지 않은 이 민주적인 분위기가 50년간 독서모임이 이어져온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사회를 맡은 김인수 강원대 독문과 명예교수는 “이 자리에서 토론이 시작되면 65학번도 한 명의 회원이고, 12학번도 똑같은 회원이다. 학번 벗고 토론한다”고 시작을 알렸다. 과연 가능할까.
토론의 서두는 역시 ‘노익장’이었다. 국내 괴테 연구의 권위자인 김수용 연세대 독문과 명예교수를 특별 초대한 가운데 정승옥 강원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파우스트 또는 진지한 농담’이라는 주제로 기조 발제를 마치자 올드보이 사이에서 다양한 논점들이 튀어나왔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의 내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기에 진 자가 구원을 받는데 구원이란 무엇인가” “내기의 승패를 가르는 말이 ‘멈추어라, 아름답구나’인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내기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와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악이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 발전과 안주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가 부딪혔다. 성경의 욥기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파우스트’와 비교되고, 죽음의 순간 “나는 모든 것이 좋았다”며 인간의 승리를 선언한 칸트와 평생을 학문과 진리의 세계에 헌신했으나 허무에 직면한 노학자 파우스트가 대조되기도 했다.
“파우스트는 신에게 빌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그레첸의 순수한 사랑의 대가로 구원받은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자 마침내 젊은 논객들의 입이 열렸다. “파우스트는 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존재인 반면 메피스토텔레스는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존재다. 인간은 현상으로서는 패배했지만, 신이 보기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이라는 결실을 얻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으로 보고 구원한 것 아닌가.”(08학번 이명우씨) 신구 세대 간의 자연스런 토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푸르른 것은 저 생명의 나무”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저 유명한 구절이 기실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찬미하는 반여성주의적 의미라는 이야기까지, 방대하고도 심도 깊은 토론이 오갔다.
무려 3시간 30분간의 토론이 “결론을 내지 않고 끝낸다”는 원칙에 따라 끝난 후 김수용 교수가 총평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진지한 토론이 이뤄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호박회 독서클럽의 박력, 그 탄탄한 지적 바탕에 찬사를 드립니다.”
“회원들간의 끈끈한 우정과 결속”으로 50년간의 독서토론을 지속해온 호박회는 “본격적인 독서 운동 전개”와 “인문정신 확산ㆍ심화”에 각별한 사명을 느끼고 있다. 윤영대 전 통계청장은 “한국은 세계적으로 교육열은 가장 높으나 독서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가장 저조한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독서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상수 전 장관은 “이기적ㆍ개인주의적 문화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인성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65학번 창립멤버들은 5년 전부터 “치매 예방을 위해” 격월 토론모임도 별도 진행하고 있다.
50년이나 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독서토론의 질적 측면에서는 개선해야 할 점들이 있다고 느끼는 회원도 있다. “일단 책을 정했으면 토론 범위를 벗어나지 말고 책 중심으로 토론 좀 합시다. 그리고 한번 발언할 때 길게 하는 거, 그거 꼭 고쳐야 합니다.” 윤 전 통계청장의 말에 불꽃처럼 폭소가 터졌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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