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운동은 잘 다듬어진 마케팅 전략을 연상시킨다. 공약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핵심을 요약해서 반복적으로 얘기한다.
트럼프가 연단에 설 때마다 반복적으로 얘기하는 단어 중 하나가 ‘굿 올드 데이즈’(Good old days)’다. ‘좋았던 그 시절’, ‘잘 나가던 옛날’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이 삶에 지친 미국 서민들의 가슴을 움직이는데 주효했다. ‘내 일자리를 뺏은 이민자’, ‘내가 다니던 회사를 망하게 한 멕시코ㆍ중국 수입품’, ‘우리 마을을 불안하게 만드는 무슬림 테러분자’등이 없던 ‘좋았던 그 시절’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가난한 백인들이 열광하고 있다.
트럼프의 ‘좋았던 그 시절’을 들을 때마다 지지자들이 떠올리는 시기는 언제일까. 가깝게는 로널드 레이건, 아주 멀게는 에이브러햄 링컨 시절까지 올라갈 것이다. 당시 미국이 지금보다 강하고 살기 좋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의 유머 감각과 여유는 지금보다 한 수 높았던 게 확실하다.
공화당의 시조(始祖)인 링컨은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단력의 정치인이지만 유머도 대단했다. 평생의 정적 스티븐 더글러스와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맞붙었을 때 일이다. 더글러스는 노예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링컨을 ‘두 얼굴을 가진 이중 인격자’라고 공격했다. 링컨은 침착하게 맞받아쳤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면 지금 이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공화당의 중시조(中始祖)인 레이건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1984년 재선에 도전했을 때 일흔을 넘은 고령(73세)이 문제가 됐다. 50대 중반인 민주당 먼데일 후보가 놓칠 리 없었다. 유세 때마다 나이를 문제 삼더니, TV토론에서는 작정하고 덤벼들 태세를 보였다. 그러자 레이건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대통령 후보 나이를 문제 삼지 않고 싶지 않다. 먼데일 후보의 ‘젊음’과 ‘무경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유머로 역공했다.?정책 대신 상대방의 나이를 문제 삼은 먼데일은 레이건에게 완패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트럼프가 ‘좋았던 그 시절’에 출마했더라도 경쟁자를 압도했을까. 거친 언어와 막무가내 인신 공격이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이 아닌 레이건이나 링컨에게 가해졌다면 어땠을까.‘맥 빠진(Low Energy) 젭’, ‘애송이(Little) 마르코’라고 놀려대는 트럼프와 얼굴 붉히고 인신공격 난타전을 벌인 부시와 루비오 대신 레이건과 링컨은 기품 있는 촌철살인 유머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렸을지 모른다. 실제로 플로리다 경선 직전 루비오 의원은 트럼프와 저질 인신공격 드잡이를 벌인 게 큰 실수였다고 뒤늦게 후회했으나, 형세는 기운 상태였다.
정치인에게 유머는 정적을 제압하는 강력한 무기다. 위대한 정치인들은 상대방 공격을 유머로 재치 있게 받아 넘기고 분위기를 순식간에 유리하게 바꾼다. 냉혹한 정치판에서 해학과 적절한 비유로 위기를 넘기게 만드는 유머는 시민과 소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트럼프 돌풍으로 쑥대밭이 된 미국 공화당 못지 않게 한국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판의 일희일비가 엇갈리는 모습이다. 밀어내는 사람이나 밀려나는 사람마다 모두 죽기살기 식이다. 누가 봐도 억울하게 떨려나는 사람도 많다. 저열한 트럼프에 저열하게 맞섰다가 패한 부시, 루비오 사례는 억울할수록 유일한 반격 수단은 유머와 여유라는 걸 보여준다. 억울하게 당한 정의와 유머의 정치인이 4월 총선 대거 생환하길 기대해본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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