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 읽는 것을 좋아해요. 프랑스 소년 랭보의 시를 읽으면서 서양으로 갔어요.”
1965년 홀연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를 추억하던 화가 김병기(100)는 랭보의 시 중 한 구절을 읊기 시작한다. 올해 백세로 접어든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소년의 모습이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이자 우리 현대미술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태경 김병기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5일부터 5월 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백세청풍: 바람이 일어나다’이다.
최근작인 ‘공간 반응(2015)’ 앞에 선 김병기는 “말 그대로 공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에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지요”라고 작품을 설명한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선이 만들어내는 인물의 형상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김병기의 그림은 서로 대립되는 요소들이 부딪치고 중첩되며 팽팽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날카롭게 등장하는 선들이 2차원 평면을 가로지르면서 미묘하게 3차원 형태도 만들어 낸다. 자신의 그림을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이라고 표현한 김병기는 완전한 추상도 완전한 형상도 아닌 그림을 통해 ‘완성으로서의 미완’을 구현하고자 한다. 결국 작가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기틀을 마련한 김병기는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았지만 스스로 모더니스트가 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노자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ㆍ도를 도라고 부르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는 뜻)에 어느 정도 공감해요”라며 입을 뗀 그는 “양식을 만들었지만 양식을 만들 때의 정신은 없어졌어요”라고 말했다. “하나의 틀이 되고 싶지 않아요”라는 그는 결코 과거에 멈춰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모더니즘 회화가 추구했던 예술로서의 예술에 머물지 않고 늘 현실을 반영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이런 말도 나온다. “오늘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나는 오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김 화백은 귀국 후 북한산을 즐겨 그렸다. 작업실이 평창동 북한산 자락에 있기 때문이다. “산보를 하고 그림을 그리면 꼭 북한산을 그리지 않아도 북한산과 관련이 있는 그림이 돼요.” 올해로 100세가 된 그는 “장수 비결이나 건강에 대한 건 묻지 말아요”라며 “나는 귀가 잘 안 들리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을 때도 있어요. 조용해서 그림에 더 집중이 돼요”라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좋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 것 같고 더 잘 그릴 것 같아요”라는 백세 화가의 열정을 담은 회화 5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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