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거둘 때는 나도 울컥했다.”
지난 일주일간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AlphaGo)와 5번기를 펼치며 바둑의 낭만과 인간의 품격을 보여준 이세돌(33) 9단은 마지막 대국에서 진 것에 대해 진한 아쉬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이 9단은 16일 오후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에서 동갑내기 부인 김현진씨, 딸 혜림(10)양과 함께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나기 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자 “이기고 싶었고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5국을 돌아보면 분명 ‘이렇게 두면 좋겠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자꾸 욕심을 부리면서 다르게 두고 말았다”며 “알파고가 어떻게 둘 지를 너무 의식했다”고 안타까워했다. 4국의 승리로 상승세 분위기를 탔던 이 9단은 지난 15일 5번기 중 가장 긴 5시간 동안 혈투를 벌였으나 280수만에 불계패했다. 그는 이날 밤 분한 마음에 형 이상훈 9단, 다른 지인 등과 함께 4시간 가량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이 9단은 ‘영웅이 됐다’는 칭찬에 대해서도 “제가요? 졌는데요 뭘,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많다”며 “바둑을 떠나 인간적인 부분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 9단은 그러나 알파고의 실력은 인간이 아직 해 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알파고는 사람이 두기 힘든 수를 두는 등 스타일이 특이하다”며 “인간이 봐도 2국의 37수는 컴퓨터가 둘 수 있는 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은 ‘미학적인 수’였다”고 평가했다. 이 9단은 그러나“알파고가 지금 상태로 멈춰 있고 우리가 연구한다면 앞으로 알파고는 프로기사들한테 상대가 안될 것”이라며 “알파고의 스타일을 전혀 몰라 내가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4국의 승리로 5국까지 기대를 품었던 프로기사들이 이 9단이 결국 돌을 거두려 하자 울컥했다는 말을 전해 듣자 그는 “내가 울컥했다”며 “울고 싶었지만 울면 안되니까 안 운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상대가 고수라면 내가 인정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 9단은 또 알파고와 재대결을 하진 않겠다는 뜻도 드러냈다. 그는 “구글은 지금 재대결 생각이 없을 것 같고 (나도) 나보다는 다른 기사가 붙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번에도 정환이(박정환 9단ㆍ한국랭킹 1위)가 뒀으면 이기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박 9단은) 한국에서 가장 잘 두는 대표적인 기사”라고 강조였다.
이 9단은 앞으로 일주일 가량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에 머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그 동안 캐나다에서 엄마와 지내던 딸 혜림양은 오는 9월부터 한국국제학교(KIS) 제주 캠퍼스를 다닐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김씨는 혜림양과 함께 제주도에 머물 예정이나 이 9단은 제주도에 정착할 계획이 없어 또 다시 ‘기러기’ 신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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