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일과 시간이 끝난 저녁 무렵 아산경찰서 지능팀에 A(28ㆍ여)씨와 A씨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A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경찰에게 사촌올케 B(35)씨가 자신에게 사기를 쳐 수억원을 뜯겼다며 울먹였다. 한 시간 넘게 A씨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고소장을 확인한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A씨의 피해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수집한 경찰은 B씨를 긴급 체포한 뒤 조사를 벌여 A씨의 피해 내용을 모두 밝혀냈다.
사건은 이랬다. A씨는 공무원으로 취직시켜주겠다는 B씨의 말을 믿고 지난해부터 충남의 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일했다. 시청에서 근무하고 싶었지만 ‘실습을 해야 한다’는 B씨의 말에 일단 복지시설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A씨는 이 곳에서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상담 일을 했다. 연수까지 다녀와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일본어 능력을 활용해 일본에서 온 결혼이주 여성들의 상담도 해줬다. 틈틈이 보고서도 열심히 작성했다.
B씨는 A씨에게 지난해 3월 시장이 주는 무기계약직 임용장, 11월에는 정규직 공무원 임용장을 주며 시청에서 근무하는 것은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B씨는 A씨에게 2명의 시청 직원을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올케에게 4억원이 넘는 돈을 줬지만 임용장도 받았고, 매달 공무원 수준의 월급과 수당도 꼬박꼬박 통장으로 입금돼 자신이 공무원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이제 시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올케가 갑자기 ‘부정한 방법으로 공무원이 된 만큼 무마 비용을 내놓으라’고 했다. 겁이 덜컥 나기도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자꾸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수상해 추궁하니 B씨가 자신을 속인 사실을 털어놨다. 임용장은 B씨가 위조한 한낱 종이에 불과했다. 상담도 근무도 공원이 아닌 자원봉사자 신분이었다. 그동안 받은 월급과 수당은 자신이 건넨 돈인 사실도 알게 됐다.하늘이 노랬다. B씨에게 그 동안 받은 돈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B씨는‘못 준다. 내가 죽어버리면 된다’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윽박 지르고, 설득도 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A씨는 결국 경찰에 고소했다.
아산경찰서는 B씨를 사기와 공문서 위조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B씨는 지난해 3월부터 1년여 간 A씨에게 “시청공무원(무기계약직ㆍ정규직)으로 임용시켜주겠다고 속여 총 4억2700여만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A씨에게 공무원 임용에 필요한 보고서 작성비를 비롯해 연수ㆍ피복ㆍ출장비 등 명목으로 총 249차례에 걸쳐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B씨는 또 시장 명의의 무기계약직 임용장과 행정서기시보 임용장 등 공무원 서류를 위조한 혐의도 받고 있다. 무기계약직 임용장의 경우 자신이 행정보조 공공근로를 하던 기간에 위조했다. 행정서기시보 임용장은 공공근로 계약이 끝난 이후 위조한 것이다. 위조 서류에는 모두 아산시의 관인이 찍혀 있었다. 경찰은 공공근로 근무 당시도 문제지만, 근무하지 않는데도 관청의 관인을 위조 서류에 찍은 점 등을 미뤄 아산시에 대한 수사도 진행할 계획이다.
경찰은 또 B씨에게 돈을 받고 시 공무원 행세를 하며 A씨를 만난 C씨와 D씨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B씨는 C씨와 D씨를 불러 A씨를 만날 때마다 2만~2만 5,000원씩 줬던 것으로 드러났다.
B씨의 치밀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B씨는 시청 여직원 휴게실에서 A씨에게 전화해 “실습 잘 하고 있으면 곧 시청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속였다.
B씨는 이렇게 조카에게 사기 행각을 벌여 가로챈 돈으로 자신의 빚을 갚았다. 돈이 더 필요했던 B씨는 더욱 악랄해졌다. A씨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임용된 사실이 감사에서 적발됐으니 무마해야 한다”며 “돈을 주지 않으면 부모 직장 감사실에 통보해 옷을 벗기겠다”고 했다. 부모가 교수와 수간호사인 A씨의 재력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B씨의 이런 치밀하고 악랄한 사기행각은 A씨의 경찰 고소로 마침표를 찍게 됐다.
B씨는 경찰에서 범행의 가장 큰 동기가 시댁에 대한 불만이라고 털어놨다. 경찰 관계자는 “B씨는 ‘사실혼 관계인 남편이 일을 하지 않고, 시댁에서도 도와주지 않아 생활이 많이 힘들었다. 나를 힘들게 한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시아버지의 동생 가족을 노렸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최두선기자 balanced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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