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사흘 학생들을 가르치고, 때로 국제대회 심사를 본다. 중고등학생인 자식 둘의 뒷바라지는 기본, 최근에는 예술감독으로 음악제도 치렀다. 제자들이 시험(콩쿠르, 연주회)을 앞두면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서 영상 강의도 하는데, 일주일 후에는 정작 본인도 그 시험 같은 독주회를 기다리고 있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피아니스트 백혜선(51)씨 얘기다.
1994년 차이콥스키콩쿠르에서 1등 없는 3등을 수상하며 인기가 지금의 손열음에 못지않던 클래식계 스타는, 어느새 “내 자식은 음악가가 되질 않기 바란다”는 워킹맘이 됐다. 2013년부터 미국 클리브랜드 음악원 교수, 2010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석좌교수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젊은 연주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 신촌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23일 독주회 ‘시와 사계’를 앞두고 있는 백혜선씨와 16일 전화로 통화했다. 그는 지금 뉴욕에 있다. 백씨는 ‘언제 연습하냐’는 질문에 “저도 그게 궁금하다”며 웃음부터 터뜨린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수업이 있는데, 밤 12시부터 3시까지 청소시간에 홀에서 연습할 수 있어요.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는 집에서 있는데 애들이 학교 간 시간에 주로 연습하죠.”
차이콥스키콩쿠르에 입상한 해에 29살로 서울대 음대 교수가 돼 화제였던 그는 “요즘 학생들 실력이 너무 좋아 ‘그때 하길 천만 다행’이라고 매일 생각하며 산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내가 그 시절 이 친구들 반만큼이라도 연습했으면 어마어마한 사람이 돼있을 거’란 생각 자주 하죠. 특히 한국 학생들이 발군이에요. 어제 심사한 힐튼 헤드 국제콩쿠르에서도 한국인 신창용이 1위를 했어요.”
백씨가 콩쿠르에 출전했던 90년대만 해도 2시간 이상의 독주 프로그램과 2개 이상 협주곡을 소화할 수 있는 출전자가 우승권에 들만큼 드물었지만, 이제 그만한 ‘기본 실력’이 없으면 예선도 통과하기 어렵다. 백씨는 “5~6년 전만해도 한국인 연주자는 ‘손가락 돌아가고 책임감은 강한데 음악성이 없다’는 스테레오타입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다. 대신 여유가 없어 템포가 급한 편인데, 긴장감, 호소력이 있어 분위기를 몰아간다”고 말했다.
데뷔 27년째인 그가 이번 연주회에서 선보이는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차이콥스키의 ‘사계’,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등이다. ‘사계’ 연주와 함께 시 낭송을, ‘전람회 그림’ 연주에서는 관련 그림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차이콥스키가 이 작품을 월간지에 발표할 때마다 곁들였던 푸시킨과 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호들의 시를 백혜선이 직접 낭송한다.
백혜선은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가을을 상징하는 곡 ‘월광’이 공연의 문을 연다. “겨울을 기다리는 쓸쓸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제자, 자식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내가 부활한다는 기분이 들죠. 가을(베토벤 월광)로 시작해서 겨울의 고요함과 다시 시작하는 봄(차이콥스키 ‘사계’ 1, 3 4, 6월)을 관객과 나누고 싶어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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