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합격했을 때, 축하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졌다. “너도 된장녀 되는 거 아냐?” 보통 축하만 받는 것에 비해 확실히 특이한 반응이었다. 엄마 친구 아들은 ‘공산당이 싫어요’에 버금가는 즉각적이고 비장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난 페미니스트가 제일 싫더라.”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내가 이대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대생은 어떻다’는 말은 도심의 비둘기보다 흔하고, 재학 기간은 치열한 인정 투쟁의 연속이었다. 마치 죽음의 5단계처럼 이대생들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거친다. 나는 ‘여대괴담’의 당사자로 학교를 9년째 다니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나보다 이대생을 많이 만나봤다면 귀 기울였을 텐데, 아니어서 흘려 듣는다.
차별 발언은 사실 비난 받을 만한 여성의 특성을 나열하고 거기에 이대생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뿐이다. 이때 ‘이대생’은 ‘된장녀’ ‘김치녀’ ‘맘충’ ‘김여사’ 등 다른 차별 표현으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욕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이름 붙이기와 차별 전략은 그 대상이 혐오하고 비난할 만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가 멸시하는 대상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된장녀’라는 단어의 등장 이전에도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고 명품백을 드는 사람은 존재했다.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누구의 무엇을 어떻게, 왜 문제시하느냐는 권력이 결정한다. 이름 붙이기는 아무데나 써먹을 수 있는 ‘만능템’으로, 사치하는 이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속성은 곧장 ‘김치의 조건’으로 재탄생한다. 여성혐오는 놀이가 되고 각종 ‘~녀’가 범람한다.
얼마 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35세 미만 남성과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남성 응답자의 54.2%가 여성 비하 표현에 공감한다고 대답했다. 남자 청소년의 41.3%는 20, 30대 여성이 전 계층을 통틀어 가장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한다고. 군대에 가지 않거나, 데이트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것 등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누린다고 상상하는 혜택이다. 하지만 여성의 징병제도의 면제는 혜택이 아니라, 장애인이 ‘국민’에서 배제되는 방식과 같다. (아직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7년간의 소송 끝에 ‘군 가산점 제도’를 폐지한 것은 남성 장애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 같은 공간은 납치와 강간 위험 때문에 마련된 것이지 혜택이 아니다. OECD 국가들 중 남녀임금차가 가장 높은 현실이나, 2015년 4일에 한 번 꼴로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했다는 통계나, 결혼한 여성 직원은 해고하는 관습을 59년이나 유지한 회사와 이를 묵인해온 사회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래도 되는 사람의 세계는 실체 없는 ‘~녀’에 대한 분노로 일그러져 있다.
만연한 혐오 현상을 번번이 ‘생존경쟁에 내몰린 남성의 울분 표현’으로 분석하는 관점 역시 매우 문제적이다. 이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하고, 생존 경쟁에 내몰리거나 빈곤에 시달리는 것은 남성뿐이라는 인상을 강화한다. 놀라지 마시라, 여성도 노동을 하고, 생존 경쟁에 내몰린다. 훨씬 더 취약한 형태로. 따라서 이것은 엄연한 젠더 문제이다. 경제 위기나 빈부 격차, 시대에 상관없이 여성 혐오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1920년대에도 ‘모던걸’들을 서구문화에 휩쓸린 ‘못된 걸’로 맹비난했으니. 앞선 조사에서 여성 응답자 중 24.1%가 이러한 비하 표현에 공감한다고 대답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마치 사상검증처럼, 시시각각 ‘김치녀’와 ‘개념녀’의 경계에서 가슴 졸이고, 기어이 ‘자기를 혐오’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삶이 누리는 혜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공짜 밥이 대순가? 택시만 타도 안 내려준다는 협박을 받으며, 매 순간 밥숟가락 영원히 놓을 위기에 놓이는데? 거대한 환상에서 깨어나서 김치 좀 그만 패고, 반찬으로 살 수 있게 놔주자.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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