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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게임사회, 알파고 대국의 그림자

입력
2016.03.1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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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게임화(化)’되고 있다. 모든 게임은 그 어떤 고귀한 정신을 표방한다 해도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는 것이 그 작동방식이다. 게임에서 승자가 된 사람들은 열광적 환호와 함께 보상을 받는다. 반면 패자들은 좌절을 온몸에 담고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소수의 승자에 열광하는 사회일수록, 다수의 사람은 패자로서의 좌절감을 각인하는 사회가 된다. 올림픽경기를 보자. 올림픽경기의 정신은 ‘인류의 일치’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올림픽경기는 스스로 그 숭고한 정신을 배반한다. 선진국과 후진국, 개발국과 개발도상국, 자본과 경쟁, 그에 따른 승자와 패자들을 양산하면서, ‘인류의 불일치’의 현실을 고착시키는 세계적 게임이 되어버렸다. 미디어를 통해서 지속되고 있는 이세돌과 알파고 바둑대전에 대한 전국민적 열광이 우려되는 이유이다.

한국의 TV 뉴스들, 신문들, 그리고 SNS들은 이 바둑대전에 대한 것으로 가득 메워지고 있다. 이세돌이 이긴 네 번째 대국이 끝난 이후 어느 신문 온라인 뉴스의 10가지 톱뉴스를 살펴보니 6가지가 이 바둑대전에 관한 뉴스이다. ‘세기적 대국’ 또는 ‘인간승리’라는 거대한 표제어가 사람들의 관심과 열광을 부추기고 있다. 부모에게 끔찍한 살인을 당한 일곱살짜리 아이의 죽음도 또는 다층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는 한국의 정치적 현실도, 바둑 대전에 대한 열광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물론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의 바둑대결은 사람들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할 만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물음은 남는다.

왜 이 바둑대전이 전국민적 관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신문이나 뉴스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주요뉴스의 순위를 결정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윤리적 의식은 우리 현실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인가. 물론 미디어는 단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변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또 다른 기능은 ‘현실을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이러한 이중적 기능 사이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인쇄된 신문이든 TV 뉴스든 ‘톱뉴스’를 결정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특정한 뉴스의 중요성이나 사소성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결정자의 해석학적 렌즈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뉴스들의 경중을 결정하는 그 과정이란, 언제나 정치적 행위이다. 즉 그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권력과 그들의 사회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관이 개입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실이란 없다, 다만 해석들이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전에 대한 열광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삶이 점점 게임화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게임들이 만들어내는 현상들은 매우 유사하다. 소수의 승자에 대한 환호와 그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삶의 게임화는 자본주의의 덕목인 고도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우리의 관심을 승자에게만 돌리는 ‘승자 우월주의’가 지배하는 게임사회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다양한 게임들에 열광하는 동안 삶의 게임화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을 점수와 등급으로 구분해버리는 집단 무의식이 ‘정상적인 것’으로 자리 잡는다. 알파고와의 바둑게임이든 또는 갖가지 예능프로그램들이든 한국사회가 이러한 다층적 게임들에 열광할 때, 우리 삶을 게임화하는 게임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승자들에게 던져지는 환호성 뒤에 가려진 패자들의 좌절과 절망감의 모습들은 우리의 관심 밖으로 던져진다. 자본의 엄청난 권력이 만들어내는 고도의 경쟁사회의 축소판이 바둑대전, 갖가지 예능 프로그램, 입시제도, 취업제도 등에서 재현되고 있다. 게임사회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어떻게 게임사회로의 이행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갖가지 게임들에 대한 열광을 자본화하고 부추기는 미디어들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면서, 그 열광의 힘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임에 대한 열광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게임들에서 패자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전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잠겨있으며, 지금도 어디에선가 부모의 학대로 죽어가고 멍들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숨 막히는 입시제도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패자로 생각하면서 웃음이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지독한 편견과 제도적 무관심으로 음지에서 더욱 병들어가는 장애인들이 영원한 패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뿐인가. 성별, 학력, 성적지향, 직업, 종교 등 여러 가지 근거로 갖가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주변부인들은 이 게임사회에서 영원한 패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토록 막아보려 했던 교과서 국정화와 테러방지법 통과는 다수의 사람이 그 권력게임에서의 패자로서 살아감을 운명처럼 자연화한다. 결국, 우리 삶은 하나의 게임처럼 승자와 패자로만 나누어질 뿐이며, 패자들은 음지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정치적 패배주의 속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각종 게임에 대한 열광은 어쩌면 이러한 ‘패자경험의 일상화’를 잠시 망각하게 해주는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갖가지 게임에 대한 열광을 부추기는 사회는, 그 어떠한 게임들에서도 승자가 될 수 없는 패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책임적 관심을 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면서 패자들을 외면하는 게임 사회의 늪으로 이행하는 것에 대하여 작은 귀퉁이들에서라도 저항의 몸짓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승자이거나 패자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생명일 뿐이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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