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연극작가로 살 때 가끔씩 기원(碁院)에 갔다. 희곡 쓰는 일 말고는 바둑이 소일거리의 전부였던 시절. 신춘문예를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기원에 있었다. 그 때 대방동의 한 기원. 주인장께서 몇 급이나 두냐고 묻더니 곧장 넉 점을 깔란다. 깔았다. 몇 점 두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사막을 걷듯이 숨이 턱턱 막혀온다. 삼분의 일이나 두었을까, “아이고 안됩니다요.” 해볼 도리가 없는데 어찌하겠나. 이후 그분의 인생과 더불어 바둑에 대한 강의 시작.
그는 젊은 날에 내기와 도박만을 일삼던 승부사였다. 카드에 마작 경마 화투 당구 카지노 등 라스베이거스도 건넌방 드나들 듯 했단다. 그는 언제나 탐구하는 자세로 도박과 내기를 연구했고 그 쪽 방면에 있어서는 나름 도통하셨다는. 그도 그럴 것이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외진 곳에서 허름한 기원을 하고 있지만. 그분의 말씀인즉, “짜릿하게는 살았지, 그런데 승부에 빠져서 산 게 별로 인생에 득이 되지는 못했어”. 더불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말, 돌의 힘.
“돌이 다 같은 돌이 아니야, 어떤 돌은 힘이 세고 어떤 돌은 플라스틱 같아, 돌도 아니지, 바둑은 돌에 힘이 있는 게 있어, 자 한 번 여기서 벗어나 봐”하면서 돌을 쓰윽 내렸다. 흔히 바둑에서 어깨를 짚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수가 그랬던 것 같다. 정말 어깨가 눌리니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두면 둘수록 늪에 빠지는 듯 답답해져만 갔다. 바둑은 기세가 있어서 그런 수에 한 번 꺾이고 나면 회복하기가 꽤나 고단하다. 기가 꺾였으니 위축되고 그러면 바둑은 여지없이 진다. 잘 보이던 수도 그때는 눈 먼 듯이 안 보인다. 사활에서 포석, 정석 이후의 몇 가지 변화들에 대하여 많이 해보신 솜씨로 설명을 해주셨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바둑의 신이랄까. 어떤 수는 정수라기보다는 꼼수에 가까워도 보였지만 여전히 그가 두는 돌은 힘과 내공이 대단했다.
그리고 고수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아우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바둑을 두는 장면을 보면 돌을 놓는 손목의 스냅만 봐도 저 사람이 진짜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대번에 보인다. 배우가 어설프게 돌을 놓거나 바둑판에 놓인 돌들의 위치가 엉성하면 그 드라마 자체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고수들은 돌을 놓는 포스부터가 다르다. 인지와 중지사이에서 미끄러지며 놓이는 돌의 우아한 떨림과 아름다움이여.
바둑이나 내기나 더 가지 말고 즐길 정도만 하면 돼. 벌었던 돈 다 날리고 배운 게 그거야. 그저 게임일 뿐이라고. 절대로 사활을 걸지 말라고. 가끔 친구와 수담이나 나누고 소주 한 잔 하면 됐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마치 모든 것을 깨달은 도인처럼 말했다. 가끔은 잊어먹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 분의 말씀은 내 삶에 여전히 지표다. 그리고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도 이제는 조금 안다. 더 가지 않고 멈추는 매력도.
이세돌이 인공지능에게 지던 첫날에 패닉 상태가 되어 장염에 걸렸다. 인간이 만든 게임 중에 그 어떤 왕도도 없어 보이던 바둑조차 이제 계산이 끝나버렸구나. 인간의 수가 기계한테 읽혀버리고 말았구나. 그것은 연극을 업으로 삼은 나에게는 더 묵직한 충격이었다. 이러다가는 인간의 감수성도 기계한테 읽히겠구나. 그러나 4국에서의 승리! 그 때 나는 연극팀원들과 시파티를 하면서 식당이 떠나갈 듯 인류를 위하여 건배했다. 그 날의 감동, 무어라 표현을 못하겠다. 이세돌, 말 그대로 돌의 힘이었다.
5국의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섯 번을 기계 앞에 앉는 한 인류의 고독한 수담만이 멋스러울 따름이다. 장염에 또다시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바둑을 만든 것도 컴퓨터를 만든 것도 사람 아닌가. 결국 인간의 승리다. 다만 센 돌이 있을 뿐. 바둑이 있어 짜릿했던 최근의 며칠이었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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