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3월 14일
동학봉기(1894년) 32년 전 ‘임술농민봉기(혹은 민란)’가 있었다. 그 신호탄이 된 진주민란이 1862년 3월 14일(음력 2월 14일) 시작됐다.
철종 13년, 조선 세정의 근간이던 삼정(三政, 전정ㆍ군정ㆍ환정)이 어지럽던 때였다. 토지가 많을수록, 조정에서 멀수록 폐해가 심했다고 한다. 그게 삼남(下三道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 특히 전라ㆍ경상도였다. 서울서 천리, 경상우도(남도) 진주는 봉건 경제의 종기가 가장 앞서 곪은 한 곳이었다. 그 시절을 살판난 듯 여긴 부패 관료(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이 거기 있었다.
그가 ‘특별’한 탐관오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대출판부의 ‘한국사특강’ 등이 밝힌 백낙신의 탐학은 이러했다. 그는 세무장부 조작과 세입 전용 등을 일상의 일로 여겼고, 무기를 사들일 예산으로 쌀을 매점해 춘궁기 농민들에게 강제 대출한 뒤 가을에 고리를 얹어 거둬 들였다. 묵정 밭을 일구거나 광산을 채굴한 이에게 상은커녕 벌금을 매겼다. 결정적인 발단은 도결 청산, 즉 유용한 공금의 장부상 부족액을 세금으로 추가 징수하는 거였다. 임술년 그 해에 털어야 할 도결 규모만 무려 5만2,000여 석에 달했고, 그걸 분납하려면 진주 일대 농가 대다수가 파산할 지경이었다. 하급 관료들의 부패, 지역 대소 토호들의 횡포도 물론 극심했을 것이다.
몰락한 양반 등이 주축이 돼 농민 동원 전략 등 거사 계획을 세웠다. 몽둥이와 농기구 등을 든 농민들은 스스로를 초군(樵軍ㆍ나무꾼)이라 칭하며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가는 동안 마을을 돌며 동참을 종용했고, 불참자에겐 소정의 불참 비용을 받았다고 한다. 무리가 커지면서 농민뿐 아니라 부민(浮民ㆍ떠돌이 백성) 천민(賤民)도 동참했다. 그들은 성을 ‘함락’했고, 백낙신을 공개 치죄해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특히 악랄했던 그의 수족들은 처형했고, 지주들의 집을 불태웠다. 재물을 나눈 뒤 그들은 6일 만에 자진 해산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조정에서 안핵사를 파견한 것은 그 뒤였다. 주도자 10명이 효수됐고, 20명이 귀양을 갔다. 관리 중 효수된 자는 없었고, 유배된 이는 백낙신 등 8명이었다.
진주 민란은 4월 경남 함양과 전남 장수로, 5월 충청 현풍으로, 평택과 제주 함경도 함흥으로 파문처럼 확산돼 임술민란이 됐다. 신분제와 봉건경제의 폐해에 맞선 민란의 경험과 에너지는 동학농민운동으로 계승됐고, 대한제국의 만민공동회와 3ㆍ1운동으로 이어졌다.
1923년 백정들의 사회주의적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의 근거지도 진주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