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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 인당수에 투신한 진짜 이유는

입력
2016.03.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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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유니버설발레단이 선보인 발레 ‘심청’. 인당수에 빠진 심청을 환상적인 수중발레로 묘사해 화제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0년 5월 유니버설발레단이 선보인 발레 ‘심청’. 인당수에 빠진 심청을 환상적인 수중발레로 묘사해 화제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파격의 고전

이진경 지음

글항아리 발행ㆍ520쪽ㆍ2만2,000원

옛 것은 늘 지금과 불화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현대 인권 사상이 용납할 수 없고, 여인의 질투를 칠거지악으로 규정한 조선 사회는 현 페미니스트 ‘언니’들을 분노에 떨게 한다. 한국의 고전 소설도 마찬가지다. 효와 충, 순종을 종용하는 텍스트들은 머리가 굵을 대로 굵은 21세기 한국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럼 이제 버려야 할까?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저자인 철학자 이진경(박태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우리 고전소설을 다시 읽었다. ‘파격의 고전’에서 심청은 세기의 효녀가 아닌 반인륜적 여성으로, 다른 세상을 꿈꿨던 홍길동은 기존 세계 질서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남성으로 둔갑한다. 뒤틀어 읽기의 목적은 고전 소설의 잃어버린 매력 회복이다. 효와 충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고전 소설에 어쩌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설령 그런 것이 없다 해도 읽는 이가 찾아낸다면 고전에 새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선본(善本)을 기본으로 하되 수많은 이본들을 참고, 고전 소설의 틀 깨기에 나선다.

심청에 대한 의심은 예의 그 극단적 효행에서 출발한다. 인당수에 투신하려는 심청을 말리며 대신 공양미 삼백 석을 내주겠다 한 승상 부인의 제안을 심청은 왜 일언지하에 거절했을까. 당시 고사의 변은 이랬다.

“부모를 위해 공을 드릴 양이면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바라며, 쌀 300석을 도로 내어주면 뱃사람들 일이 낭패이니 그 또한 어렵고, 남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뒤에 다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일단 이유가 너무 많은 것부터 수상하다. 뱃사람들이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는 것이나 약속의 중함을 실천하는 것, 둘 중 무엇도 심청 자신의 목숨 보다 중할 수는 없다. 공의 순도를 따질 양이라도 그것을 효보다 앞세우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심청은 눈 먼 아비를 혼자 두고 죽을 경우 그가 감내해야 할 비참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불효라는 것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진정한 효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 앞에 심청은 왜 그것을 버렸을까. 제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먹이는 ‘삼강행실도’의 과격한 ‘효도 쇼’에 경도된 사회적 희생자? 아니면 스스로를 축내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마조히스트?

수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저자는 반항으로 번득이는 심청의 눈을 본다. 효라는 이상을 내걸고 젊은 세대, 심지어 미성년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 비정한 사회. 심청은 그토록 숭고한 효에 제 몸을 갈아 넣음으로써 효의 숨겨진 톱날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그 근거로 용궁에서 살아 돌아온 심청이 바로 아비와 고향마을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든다. 그에 따르면 심청이 몸을 던진 바다는 “모든 것이 유동적인 액체적 공간 (…) 어떤 확고하고 지고한 가치나 규범이 변이와 생성의 힘에 ‘침수’되어 유동화되는 곳”이다. 거기서 심청의 자아는 죽었고 그를 잡고 있던 사회의 모든 규범도 죽었다. 다시 태어난 심청은 각성한 인간으로서 관습의 실천자가 아닌 질문자가 된다.

이쯤 되면 저자의 분석이 맞냐 틀리냐는 중요하지 않다. 고전에 현대의 숨을 불어 넣어 되살리는 과정 자체가 별도의 즐길 거리가 된다. ‘콩쥐팥쥐전’ ‘허생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전우치전’ ‘박씨부인전’까지,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했던 서사들이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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