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지지율 2위 구스만
“규정 위반” 출마 자격 박탈
주변에 아버지 조력자 많아
“독재 정당성 부각될라” 우려 시각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페루에서 독재권력을 휘둘렀던 알베르토 후지모리(78) 전 대통령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41) 민중권력당 대표가 4월 10일로 예정된 차기 페루 대선을 앞두고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다. 유력한 라이벌이었던 페루국민당 소속 훌리오 구스만(45)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출마 금지 결정으로 인해 선거 레이스에서 밀려났다. 후지모리 후보의 승리는 아버지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명예 회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페루 대선 레이스에서는 후지모리 대표가 지지율 35%로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가운데 구스만 후보가 17%로 뒤를 쫓는 형태였다. 페루 대선은 과반을 넘는 지지를 얻는 후보가 없을 경우 결선 투표를 진행하기 때문에, 구스만 후보가 후지모리 후보와 일대일로 맞붙는 결선에서 역전 승리를 노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9일(현지시간) 페루국민당이 구스만을 대선 후보로 선출하는 과정에서 당 내부 규정을 위반했다며 구스만의 대선 출마를 금지시켰다. 구스만 후보는 “이번 결정은 독재자의 딸 후지모리의 집권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외교전문 격월간 포린 폴리시는 페루에서 민주 정부의 거듭된 실정으로 후지모리 대표의 아버지인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 집권기의 향수가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현지 언론 라 레푸블리카에 “15년 동안 민주 선거로 선출된 정부들이 약속을 파기하기만 했기에 페루 내에선 독재정권이 오히려 더 대표성 있는 정권으로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인권침해와 부패 등의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후지모리 대표는 아버지의 독재정치를 “잘못이다”라고 표현하는 한편 독립된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보여 민중권력당을 제1당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후지모리 대표 주변에는 여전히 아버지를 도왔던 정치인들이 많아 집권하면 독재 정권의 정당성이 부각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후지모리 외에도 과거 장기집권한 국가원수의 자녀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케냐에서는 국부로 불리는 조모 케냐타(1964~78) 초대 대통령의 아들 우후루 케냐타가 2013년 대통령이 됐다. 5월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둔 필리핀에서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65~86) 전 필리핀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 상원의원이 유력한 부통령 후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독재자의 자식이 민주주의 하에서도 집권하는 이유로 가족 성 자체가 브랜드로서 힘을 지닐 뿐 아니라 인맥을 쌓는 데도 유리하다는 점을 들었다. 특히 후지모리와 케냐타, 마르코스의 인기에는 아버지 독재정권 치하의 경제 발전과 높은 치안 수준에 대한 향수가 후광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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