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지사ㆍ민주열사 눈물 밴 곳
1987년 구치소 옮겨가며 쇠락의 길
100년 넘은 한옥ㆍ지붕만 바꾼 초가집
재개발 허가 나 1월부터 철거 시작
“이제 와서 멈추기 힘들겠지만 일부 골목길 역사 흔적 보존해야”

‘주인이 없는 빈방’
9일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 앞 사잇길 끝에 위치한 구본장 여관. 이 골목에서 유일하게 영업중인 여관의 입구에는 사진전을 알리는 흑백 포스터가 붙었다. 골목을 떠나지 못한 주민 10여명이 골목의 옛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준비한 전시다. 여관 내부의 계단을 따라 벽면에 붙은 흑백 사진마다 서대문형무소와 초가집이 밀집한 무악동(당시 현저동) 골목길과 무악재 고갯길 등 옛 풍경들이 담겼다. 구본장 여관 주인 이길자(64)씨는 “옥바라지 골목이 사라지고 서대문형무소만 남는다면 민초들의 역사도 사라지는 것”이라며 “사진전은 내 모든 것이 담긴 골목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마주보고 있는 이 오래된 골목은 철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국권을 상실하기 전인 1907년, 일제 조선통감부는 서대문에 형무소를 지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독재정권시절에는 민주열사들이 감옥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이 골목은 수감자의 가족들이 머물며 옥바라지했던 곳이라서 일명 ‘옥바라지 여관골목’으로 불렸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씨 등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들도 이 골목의 여관에서 자식들을 옥바라지했다고 전해진다.
1987년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옮겨가면서 옥바라지 손님이 없어졌고, 골목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다 지난해 7월 주민 70% 이상의 동의를 받아 재개발 정비사업 관리처분인가를 받았다.

지난 1월부터 철거가 시작된 골목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었다. 좁은 골목길마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여관과 상가건물이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건물마다 버려진 가구더미와 쓰레기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일부 주민들이 살고 있는 낡은 주택의 굳게 닫힌 문에서 그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떠나지 못한 주민 18가구는 여전히 골목 보존을 염원하고 있다. 이들은 골목의 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며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민 김용하(61)씨는 “골목에 100년 넘은 한옥과 지붕만 수리한 초가집,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는데다 옥바리지에 얽힌 애환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라며 “서촌이나 북촌처럼 골목을 보존하고 게스트하우스, 카페 등을 조성하면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주민들도 계속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는 “옥바라지의 역사성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행정 관청이 제대로 된 인문학적 조사도 없이 재개발 허가를 내줬다”면서 “이제 와서 재개발을 무효화하기 힘들겠지만 일부 골목길을 재현하거나 건물이나 터를 남기는 등 역사적 흔적을 보존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손효숙기자 shs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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