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바둑은 정치와도 꼭 닮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상하고 한가한 취미로 보이지만 물밑에서의 치열함과 승패의 냉혹함은 정치의 본질과 유사하다는 평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난히 정치인들 중에서는 바둑의 고수가 많습니다. 이세돌 9단과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세기의 대국이 예상치 못한 알파고의 불계승으로 끝난 9일에도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대국장으로 총출동 했습니다.
비록 예전보다 인기가 시들해지긴 했지만 정치권에서 ‘바둑’은 여전히 사랑 받는 스포츠입니다. 과거 정치인들은 바둑을 빌미로 마주 앉아 서로의 수를 주고받으며 수담(手談)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한중일 국회의원들도 친선바둑을 통해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죠. 제1회 한일 의원 바둑대회 우승은 국회의원 바둑모임 ‘기우회’의 총무인 이양희 자민련 의원이 차지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실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통합니다. 그렇다면 19대 국회의 바둑 고수는 과연 누구일까요.
19대 국회 지도부에서는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 대표가 바둑 실력자로 꼽힙니다. 아마 5단이자 현 기우회 회장인 원 원내대표는 이날도 누구보다 먼저 대국장을 찾는 열의를 보여주기도 했죠. 그는 “이세돌 9단이 두는 첫 수는 인류의 도전과 역사를 비추는 또 다른 위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이날 대국을 인류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의 ‘첫 발’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아마 3단인 문재인 전 대표는 과거 “중학교 때 바둑을 시작해 아마추어 3단 정도 수준까지 갔는데, 청와대 들어간 이후 바빠서 돌을 잡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평소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문 전 대표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와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의 대국을 복기해보곤 했다네요. 이날 문 전 대표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측근에 따르면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고 합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 역시 ‘월간바둑’이라는 바둑잡지에 인터뷰가 실렸을 정도의 바둑 애호가입니다. 당시 아마 5단이라고 자신의 실력을 밝힌 적 있는 안 대표는 이날 대국이 생중계되는 서울 종로의 아름다운 극장을 찾아 “대학교 2학년 때 책을 구해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 1년 만에 아마 2단 수준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안 대표는 “바둑과 IT가 만나는 것이 제 예상보다 20년은 빠른 것 같다”며 “승패를 떠나 맞대결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정치권에서 당을 장악하고 느닷없는 야권통합 제안으로 소위 ‘선을 잡았다’고 평가 받는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 대표의 바둑 실력은 어떨까요. 김 대표는 이날 대국장을 찾아 “(바둑돌을) 좀 만져는 봤는데, 바둑을 정식으로 둬보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평소 ‘좌고우면’하지 않는 빠른 판단력과 강한 추진력을 갖췄다고 평가 받는 김 대표는 최소 1시간에서 최대 5시간까지 자리에 앉아 반상만 들여다봐야 하는 바둑이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당 안팎에서 정치 9단으로 통하는 김 대표이지만 바둑에는 취미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바둑에 취미가 없기 때문일까요. 애초 대국장을 찾을 예정이 없었던 김 대표는 안철수 의원 ‘덕분에’ 이날 대국을 참관하게 됐다네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회의에서는 박영선 비대위원이 회의 도중 김 대표를 거쳐 이종걸 원내대표에게 전달한 ‘메모’가 카메라에 잡히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메모에는 “안철수가 오늘 이세돌 대국 참관하러 간다는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죠. 대국이 펼쳐진 이날 오후 김 대표는 대국장에 깜짝 등장해 “이세돌을 응원하러 왔다”며 이 9단의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이날 대국장 안팎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정치훈수’도 쏟아졌습니다. 원 원내대표는 “서양 체스는 남을 죽여야 끝나는데 바둑은 상생하는 철학을 갖고 있다. 정치권도 바둑과 같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생의 철학을 해야 할 것 같다”며 김종인 더민주 대표를 향해 일침을 날렸습니다. 이에 김 대표는 “정치가 사람이 하는 거니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라고 우회적으로 새누리당의 기계적인 협상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이들과 같은 자리에 있진 않았지만 안철수 대표는 “인류가 컴퓨터와 대결하는 역사적 순간인데 우리 정치는 수십 년, 수백 년 전 낡은 패거리 정치의 끝에 있다”고 여야 정치권에 대해 날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한편 바둑에 전 세계의 관심이 모아진 이날 ‘바둑계의 전설’로 통하는 조훈현 9단이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 공모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원 원내대표가 직접 제안하며 공을 들여온 인사로 당에서는 1,000만 바둑인구의 표심에 호소력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네요. 바둑에는 묘수 악수 속수 절충수 의문수 악수 자충수 무리수 등의 용어들이 있습니다. 과연 조훈현 9단의 영입이 새누리당에게 어떤 한 수로 작용하게 될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전혼잎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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