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3월 9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3월 9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연설했다. DJ는 그날 통일에 앞서 냉전 종식과 평화 정착이 한반도의 당면 목표라는 점, 한국 정부는 북한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협력할 의지가 있으며 그를 위해 남북 당국자간 대화에 북한이 응할 것을 촉구했다. 이른바 ‘베를린 선언’이었다.
3개월여 뒤인 6월 13일 DJ는 평양을 2박3일 방문, 분단 55년 만에 처음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마지막 날, 6ㆍ15 남북공동성명이 전세계로 타전됐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원칙과 이산가족 상봉ㆍ비전향장기수 송환 등 인도적 문제 합의, 남북 균형발전과 교류ㆍ협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합의 등이 골자였다. 김정일의 답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DJ의 통일정책 구상은 1971년 4월 당시 신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이래 줄곧 이어져온 그의 대북 철학이었다. 이른바 ‘3원칙(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 3단계(남북연합-남북연방-완전통일)’ 통일방안. 97년 대선 공약에서도, 98년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저 주장을 거듭했고, 국민정부 3대 국정과제 중 하나도 ‘햇볕정책’이었다. ‘베를린선언’이 있던 2000년 신년사에서도 그는 남북경제공동체 구성 및 국책연구기관간 협의, 철도ㆍ전력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지원과 특사교환 등을 북측에 제의했다. 그 해 말 DJ는 대한민국 민주화 및 인권 신장,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베를린 선언이 있은 지 7년 뒤인 2007년 5월 16일 DJ는 다시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연설했다. 베를린자유대가 제정한 ‘자유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서 그는 이렇게 수락연설을 했다. “자유와 인권은 인간의 천부의 권리입니다.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 생명의 위협으로부터의 자유, 정치적 박해로부터의 자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2007년은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긴장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돼 있던 때였다. 그는 ‘베를린 선언’과 그 이후를 회고한 뒤 남북 평화시대의 염원으로 연설을 맺었다. “(…한다면) 한국의 남쪽을 출발한 기차가 한반도를 종단해서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도착할 것입니다. 베를린을 거쳐 파리, 런던이 종착지가 될 것입니다. 동서를 잇는 철의 실크로드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독일을 비롯한 EU 각국에 큰 혜택을 줄 것입니다….”
그의 임기는 저 이상의 기틀을 다지기에 너무 짧았고, 그는 현실보다 꿈을 앞세워 너무 서둘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국제 정세도 그에게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햇볕정책’ 하나로도 5년 단임 헌법을 원망스럽게 여기게 한 유일한 한국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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