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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의 녹슨 못, 흙수저를 위로하는 악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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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의 녹슨 못, 흙수저를 위로하는 악보가 되다

입력
2016.03.0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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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1998)’. 공사장에서 주운 녹슨 못을 낚싯줄에 묶어 악보를 표현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악보(1998)’. 공사장에서 주운 녹슨 못을 낚싯줄에 묶어 악보를 표현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집 근처 공사장에 못들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더라고, 다 녹이 슬어서. 참 처량하지 않아?”

벌겋게 녹이 슨 못을 주워 만든 ‘악보(1998)’는 민중미술 작가 주재환(76)의 작품세계 그 자체다. 낡은 프레임 위 다섯 가닥의 낚싯줄이 악보의 오선, 그 위에 매달린 열 다섯 개의 못이 음표 역할을 한다. 주재환은 전시 개막 전날인 3일 열린 간담회에서 ‘악보’ 앞에 서서 “삶이 고달픈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 들리지 않냐”고 물었다.

주재환 작가.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주재환 작가.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주재환은 작품을 만드는 데 돈이 거의 들지 않아 스스로를 ‘천원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흙수저’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의 의미는 결코 값싸지 않다. 작가는“이 못을 사용하던 노동자들은 자기 집이 아니라 남의 집을 짓던 거잖아, 다 짓고 나면 결국 버려진 못처럼 어딘가 나뒹굴겠지”라며 이시대 흙수저들에 애정을 드러냈다.

왼쪽부터 ‘아침햇살(2009)’ ‘악보(1998)’ ‘이 알맹이도 그 자들이 빼먹었을까(2010)’. 주재환은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작품 활동을 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왼쪽부터 ‘아침햇살(2009)’ ‘악보(1998)’ ‘이 알맹이도 그 자들이 빼먹었을까(2010)’. 주재환은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작품 활동을 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악보는 캔버스 없이 프레임으로만 구성됐다. 그래서 뒤의 벽에 설치된 ‘이 알맹이도 그 자들이 빼먹었을까(2010)’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설치돼 뒤의 작품과 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에 작가는 “민중의 삶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작품은 그가 예술 활동을 통해 보여주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부각하는 방식으로 설치됐다.

주재환은 다양한 주제를 다양한 매체로 표현한다. 스스로 ‘광대형’이라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재미있다. “같은 것만 하면 지루하다”며 웃는 주재환의 작품에는 그러나 다양성 속에 공통적인 배경과 사건이 존재한다. 바로‘어둠’과 ‘변신’이다. 전시를 기획한 유혜종 박사는 “어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꿈틀대며 변하는 것을 봐달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녹슬어 버려진 못이 민중의 음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 같은 것이다.

‘괴산괴우(2008)’. 이상한 산과 이상한 비를 의미하는 이 작품에서 빗줄기가 다양한 각도에서 떨어지고 있다. 기존 인식과 개념을 뒤흔드는 표현은 긴장감을 준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괴산괴우(2008)’. 이상한 산과 이상한 비를 의미하는 이 작품에서 빗줄기가 다양한 각도에서 떨어지고 있다. 기존 인식과 개념을 뒤흔드는 표현은 긴장감을 준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설탕? 소금?(2008)’. 캔버스 위에 하얀 가루가 붙어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설탕? 소금?(2008)’. 캔버스 위에 하얀 가루가 붙어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작가는 ‘설탕? 소금?(2008)’ 등의 작품으로 미술계의 제도와 질서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캔버스 위의 설탕인지 소금인지 모를 하얀 가루는 일상과 미술 사이의 구분을 깨려는 시도다. 두 개의 캔버스를 덧대 2차원 회화와 3차원 조각 미술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든다. 시각과 미각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엿볼 수 있다.

주재환의 민중미술에 대해서는 사회 비판적 목소리와 작가가 살아온 삶이 늘 화제의 중심이었다. ‘어둠 속의 변신’은 사회적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 작가에게 고유한 미학적 가치에 주목하게 하는 회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4월 6일까지 열린다.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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