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줌인… 세월의 퍼즐을 맞추다

입력
2016.03.04 14:00
0 0

‘눈(SNS)사람’은 디지털 스토리텔링 형식의 인터뷰 콘텐츠입니다. 페이스북ㆍ트위터ㆍ유튜브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인기 있는 ‘소셜 스타’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합니다.

■ 프롤로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안세홍(45)씨의 렌즈는 전쟁의 암울한 이면,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을 향한다. 그의 주된 피사체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가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성노예 피해자들,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는 필리핀, 동티모르 등 아시아 전역의 성갈취 피해자들이다.

일본이 듣기 좋은 허울을 씌워 만들어 낸 위안소 제도는 자신들의 과오는 교묘히 위장한 채 수많은 여성들의 존엄을 짓이겨 버렸다. 그 때문에 피해 여성들의 상처는 오롯이 개인이 떠 안아야 할 몫인 것처럼 여겨졌다. 안씨는 "피해 여성들은 지옥 같은 위안소에 왜 끌려갔는지 궁금해하지만 가해국은 물론 피해국 정부도 그것이 전쟁 범죄였으며 당신들은 그 피해자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며 "국제적 차원의 진상규명과 일본의 공식사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씨는 전쟁의 주체, 일본에서 피해자들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했단다. 2012년엔 니콘이 '위안부' 사진전을 일방 취소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명예훼손 소송을 냈고, 3년여 만에 최종 승소했다. 20여 년간 한결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안씨를 만났다.

중국에 남겨진 '위안부' 조선인 피해자들. 사진가 안세홍
중국에 남겨진 '위안부' 조선인 피해자들. 사진가 안세홍

■ Take1 만남

Q '위안부' 피해자들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A 1996년에 사회평론 '길' 에서 화보 취재차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찾았다가 피해자들을 처음 만났다. 처음엔 말도 제대로 못 붙였다. 남자여서일까, 공연히 나도 가해자란 생각에 죄스러웠다. 돌아와서도 할머니들의 모습이 머리 속에 남아 다시 나눔의 집을 찾았다. 자원봉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할머니들의 얘기를 직접 들으면서 내 마음의 빗장도 풀렸다. 자원봉사를 다닌 지 3년쯤 지났을 때 내가 가장 잘하는 사진으로 피해자들의 얘기를 알리기로 마음 먹었다.

Q 중국에 남겨진 '위안부' 피해자들의 얘기를 주로 담아왔다. 시선을 중국에 둔 이유가 있나.

A 아무도 안 한다고 나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웃음) 2001년 한국정신대연구소에서 중국에 있는 피해자들을 찾는 실태조사를 했는데, 나는 기록 담당으로 참여했다. 중국 내륙으로 끌려간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는 종전 후에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군 부대의 위안소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을 통해 수소문하며 무작정 피해자를 찾아 다녔다. 그때 이수단(94) 할머니도 처음 만났다. 연구소 사업이 없어지면서 혼자 중국에 있는 피해자를 만나고 기록했다. 12년간 9차례 중국에 건너가 곳곳에 계신 피해자들을 만나 사진으로 엮은 게 2013년 출간한‘겹겹’이다.

중국 흑룡강성에 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수단(94) 할머니는 경로원에서 정신분열증, 대퇴골 골절 등 건강이 쇠약해져 혼자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사진가 안세홍
중국 흑룡강성에 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수단(94) 할머니는 경로원에서 정신분열증, 대퇴골 골절 등 건강이 쇠약해져 혼자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사진가 안세홍

■ Take2 소녀

Q 중국에 있는 피해자들은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나.

A 버림을 받은 거다. 일본군이 주둔지에서 빠져나간 뒤로 피해자들은 도움 받을만한 곳이 없었다. 중국말도 모르고 돌아갈 차비도 없고... 중국이란 땅에 끌려갔지만, 자신이 중국의 어디쯤 있는지 피해자들은 모른다. 지명만 알지. 북경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는 '귀향선'으로 조선인들을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그 외의 지역은 돌아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이수단 할머니가 계신 둥닝현만 해도 지금도 하얼빈에서 하룻밤 자고 한나절은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오지다. 당시는 어땠겠나.

Q 한국으로 모셔올 순 없나.

A 무작정 모셔오는 게 방책은 아니다. 돌아와도 가족이 없으니까. 중국에 남은 조선인 피해자들은 중국으로 국적을 바꿨거나, 고향이 북조선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도움 받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다. 2001년에 중국에 남겨진 분들의 피해를 조사한 후 한국정부에 도움을 요청 했더니 피해자들의 현재 국적이 한국이 아니어서 어렵다고 하더라. 2005년께 국적이 회복돼 돌아온 분도 있고 정부 지원을 받고 계신 분도 있다. 하지만 도움을 거부한 분도 있다.

Q 3·1절을 맞아 중국의 피해자를 만나러 간다고.

A 얼마 전 이수단 할머니의 양아들로부터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식사도 죽 한 끼가 전부라고. 2년 전에 할머니 건강검진을 해드렸는데, 그새 건강이 악화됐나 보다. 페이스북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의료지원을 위해 찾아 뵙기로 했다. 2월27일에 떠나 3월3일에 돌아온다.

사진집‘겹겹’에서 안세홍 작가가 기록한 여덟 명의 할머니 중 2016년 3월 현재 이수단·김순옥 두 할머니만 살아 계신다.

동티모르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카르민다 도우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홀로 움직일 수 없고 갈 곳이 없어 오지의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사진가 안세홍
동티모르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카르민다 도우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홀로 움직일 수 없고 갈 곳이 없어 오지의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사진가 안세홍

■ Take3 세월

Q 중국을 넘어 아시아의 피해자로 시선을 넓히고 있는데.

A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20여 개의 국가에서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세계 각지에 있다. 일본군 성노예로 동원된 여성의 숫자는 5~2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한국(44명), 북한(2명), 중국(21명), 대만(4명), 필리핀(20명 이상), 인도네시아(37명 이상), 동티모르(10명), 네덜란드(2명) 등 8개국에 140명 이상의 알려진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다. 그러나 피해국에서 관심이 적은 탓인지 정부기관들은 피해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Q 우리나라의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과 어떻게 다른가.

A 조선·대만·일본이 '위안소제도'에 의해 희생됐다면, 필리핀·인도네시아·동티모르 등 동남아시아는 일본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때 납치돼 성노예가 됐거나, 단순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 나는 주로 장기간 성폭력에 노출됐던 피해자들을 취재한다. 흥미로운 건 필리핀의 경우 피해자 가족들이 피해사실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피해자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피해사실을 쉬쉬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억울함을 알리고 싶어했다. 피해자들이 속병을 앓기보다 함께 모여 노래와 춤으로 한을 풀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Q '겹겹프로젝트'는 무엇인가.

A 세계 각지의 피해자들을 만나려면 경비가 만만치 않아 시민들의 힘을 모아 사진전을 열고 있다. 소셜펀딩 등을 통해 모금도 하고, 회원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사진전과 강연회, 피해자지원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프로젝트로 만들었다. 피해자들에겐 돈 몇 푼 보다는 지속적인 관심과 물품 지원, 거주지 환경 개선이 필요했는데, 시민들의 관심이 모이면서 지원이 수월해진 면이 있다. 중국에 계신 박차순 할머니 집 고쳐드리기 행사도 진행했고, 이수단 할머니도 계속 찾아 뵐 수 있고.

1998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렌즈에 담아온 사진가 안세홍씨가 3·1절을 맞아 중국의 이수단 할머니를 만나러 떠나기 전인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의 한국일보 사옥을 찾았다. 김주영기자
1998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렌즈에 담아온 사진가 안세홍씨가 3·1절을 맞아 중국의 이수단 할머니를 만나러 떠나기 전인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의 한국일보 사옥을 찾았다. 김주영기자

■Take 4 흔적

Q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려면 전쟁범죄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전시 성폭력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만 나ㅡ타난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독일의 나치가 폴란드 여성들을, 베트남전쟁에선 한국군이 베트남여성들을 강탈하지 않았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국과 일본, 양국 외교관계 관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를 결론 내렸지만,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전세계 피해자들의 피해규모와 실태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가해국 일본이 공식사죄하고 피해배상 해야 한다.

Q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성노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A 위안부(Comfort Woman)는 가해자가 만든 용어이지 피해자 입장이 반영된 단어가 아니다. 범죄 행위와 주체를 명확히 알려주는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라는 표현이 전쟁범죄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필리핀만 하더라도 성노예라는 표현은 자연스럽다. 국제사회에서도 통용되는 표현이고. 일본이 여전히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가리는‘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만 봐도 명확한 단어 사용이 필요해 보인다.

Q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이라는 주장으로 논란이 된 책 ‘제국의 위안부’박유하의 주장은 어떻게 보나.

A 왜 조선인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는지 배경을 따져봐야 한다. 잡일을 하면 한 달에 5원 정도 받던 시절인데, 일감을 줄 테니 선금으로 300~400원을 준다고 꼬드겼다. 그런데 피해자들이 안내 받은 곳이 공장이 아니라 위안소였던 거다. 자발적 매춘의 사례로 지목한 ‘권번’ 역시 재주를 사고 팔았지, 일본 기생처럼 성(性)을 팔지 않았다. 박유하의 주장은 전체가 아니라 파편만 바라본 것이다. 물론 나도 할머니들을 만나보면 과거를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 처음엔 너무 무서웠지만 일본 장교를 좋아하게 돼 동거하던 분도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일부다.

"내래 죽기 전에 한복 입고 사진 박히는 게 소원인데, 한 장 박아주소."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옥(94) 할머니가 큰딸에게 선물 받은 한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가 안세홍
"내래 죽기 전에 한복 입고 사진 박히는 게 소원인데, 한 장 박아주소."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옥(94) 할머니가 큰딸에게 선물 받은 한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가 안세홍

■Take 5 귀향

Q 사진집이 증언집에 가깝다. 혹자는 개인이 만들어낸 최고의 '아카이브'라 칭하기도 했는데.

A 내 사진은 피해자들과 제 3자의 연결고리다. 끌려감, 감금,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폭행과 버려짐. 이는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상처다. 다만, 할머니들이 연세가 들면서 기억이 토막났다. 그래서 나름의 검증을 하고, 기억의 퍼즐을 맞춘다. 고통이 풀리지 않는 한 마음의 응어리는 70년 전의 세월에 쌓인다. 그러나 70년 전의 일 만큼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 내가 사진 기록에 열중하면서도 피해자들과 꾸준히 만나고 생활 지원에 힘쓰는 이유다.

Q 올해의 계획은.

A 현재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피해자 지원과 기록을 위한 기금을 모금 중이다. 올해는 대만과 네덜란드의 피해자들을 만날 생각인데 모두 아흔을 넘기셨으니 만나기 쉽지 않다. 서양인인 네덜란드 피해자들의 사연을 꼭 취재하고 싶은데 피해자들이 인터뷰를 꺼려 설득 중이다. 일본의 도쿄와 교토, 오사카, 고베, 중국의 난징 등에서 사진전도 열 계획이다.

Q 왜 일본에서 꾸준히 활동하는가.

A '위안소제도'에 희생된 건 조선인 뿐이 아니다. 아시아 전역에 피해자들이 살아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얘기를 누구보다 가해국인 일본이, 일본인들이 잘 알아야 한다. 일본 시민들이 깨어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확실히 니콘과의 분쟁 이후 사진전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사진전을 찾는 젊은이들도 늘었다. 지난해 도쿄 사진전에선 중년의 일본 여성이 사진을 본 후 꼭 알아야 할 역사라며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다시 왔더라. 뿌듯했다. 이렇게 작은 움직임들이 큰 물줄기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사진가 안세홍(45)씨의 작업 모습. 사진가 안세홍
사진가 안세홍(45)씨의 작업 모습. 사진가 안세홍

■ 만든 사람들

기획 및 글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사진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안세홍 사진가 ianfu@juju-project.net

디자인

백종호 jongho@hankookilbo.com

프로그래밍

김태식 ddasik99@hankookilbo.com

퍼블리싱

정동우 junghoi12@naver.com

속기 및 보조

오주석 인턴기자(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3)

중국에 있는 이수단(94)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가족사진. 가족들은 북한에 있어 전쟁이 끝나도 만날 수 없었다. 사진가 안세홍
중국에 있는 이수단(94)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가족사진. 가족들은 북한에 있어 전쟁이 끝나도 만날 수 없었다. 사진가 안세홍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