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절 오후, 함께 살고 있는 네 명의 집 사람 중 가장 어린 ‘굴’의 졸업식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라 함은 ‘고삼’이라는 무거운 단어에서의 해방과 동시에 접근금지였던 어른들 놀이영역(?)의 봉인도 함께 풀리는 그야말로 ‘고3 독립만세’의 날이다. 졸업하는 친구들에게 축하와 함께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세상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요. 뭐, 졸업하자마자 행복 끝 고생시작이라고 봐야지. 웰 컴 투 더 헬.”
‘굴’이 다니고 있는 학교는 영등포에 위치한 ‘하자마을’(구 하자센터)이다. 이곳은 1999년 연세대가 서울시로부터 수탁받아 운영을 시작한 일종의 중ㆍ고등교육 대안학교인데 공식 명칭은 '서울시립 청소년 직업체험 센터'이다. 이곳 졸업식은 여느 고등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청년과정 졸업자 1명과 고등과정 졸업자 4명 총 5명의 졸업자들이 한 명씩 단상에 올라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들이 만들었던 것들, 해왔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이 담긴 영상을 틀었다.
시골에서 자란 학생은 누구보다 농사에 자신 있었다. 그래서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작물을 키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첫 단계부터 충격이었다. 시골에 널리고 널렸던 그 흙을 도시에서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알게 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도시에서 소비되는 전기를 충당하기 위해 도시와는 상관없는 농촌사람들이 터전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사실, 발전소와 송전탑 설치 반대를 위해 매일 농성장에 나가면서 물을 주지 못해 말라 죽어가는 고추를 보면 슬프지만, 그 고추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밀양 할머니들의 이야기, 그 과정에서 인권이나 기본생존권에 대한 논의 없이 무작정 공권력을 투입해버린 정부의 야만적 행위 또한 어린 눈에 각인되었다. 발전소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원전사고가 있던 일본 후쿠시마(福島)로 옮겨갔다. 그곳엔 원폭 이후에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후쿠시마의 어머니들은 어린이들의 인권보장을 위해 정부에게 소송을 걸었고, 마지막 농부들은 그곳에 남은 동ㆍ식물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연구했다. 그 때문에 피폭된 수치가 많게는 정상인의 천배 이상의 차이가 났으며, 먹는 농사를 하던 그들은 이제 입는 농사를 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목화씨는 영등포 하자마을 콘크리트 옥상에 심겨져 꽃을 틔우고, 씨아에 돌려져 씨들이 분리되고, 흰색이 아닌 브라운색 목화솜을 터트렸다.
“만약 누군가 무엇을 하고 있고,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사람을 향한 ‘공감’으로 부터 나온 마음이라 생각해요.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동시대에 일어난 주변의 사건과 사고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보기에는 돈도 안 되고 별 거 아닌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런 ‘공감’으로 인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가져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무언가는 하는 어른이 되겠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케추아부족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우화가 있다. 숲에 큰 불이 나자 모든 동물들은 도망치느라 바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작은 벌새 크리킨디는 부리에 물을 머금고 불을 끄기 위해 부지런히 왔다 갔다 했다. 동물들은 그게 무슨 소용 있냐며 비웃었다. 크리킨디는 말했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중이야.”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마리 크리킨디로서 제 몫을 하고 있었던가.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랬다.“저항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이들의 외침에 그저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고생 끝에 그들이 무언가를 이루어 내면 그제야 슬며시 숟가락 얹어서 살기 좋은 세상 묻어가는 건 참말로 염치없는 짓이겠다 싶다. 환경학 최고의 고전‘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이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 했던 봄이 오고 있다. 이번 봄엔 뭐든 해야겠다.
남정미 웃기는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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