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2012년, 미국 대선의 쟁점은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에 모아졌다. 대통령이었던 오바마 후보는 국내총생산(GDP) 22.5% 범위 내에서 예산을 확대해 정부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필요한 재원은 부유층 증세를 통해 마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반면에 공화당 후보였던 미트 롬니는 내년 5,000억달러 수준의 예산을 감축해 시장의 흐름에 경제를 맡기겠다고 공언했다. 또한 일자리 창출을 통해 세수를 확보하되, 부유층을 포함 모든 세금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그 외에도 의료보험이나 이민정책, 소수자 정책 등에서도 다른 관점을 보였다. 정당 간 정책대결의 양상은 2016년 대선 후보를 뽑는 지금도 여전하다. 심지어는 같은 당 내에서도 정책이 명확한 차별점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 그럼 20대 총선을 앞둔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실망을 넘어 암울하기까지 하다. 정책대결은커녕 발표된 정책조차 없다. 대체 무엇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일까.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보도자료를 통해 2, 3건의 부문별 공약을 발표했지만, 수권정당의 수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공식적으로 묶은 정책공약집은 아예 2014년 지방선거에서 멈춰있다. 더불어민주당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문별로 하나하나씩 발표를 하고 있지만 그 수는 기대에 못 미친다. ‘정감마켓’이란 이름으로 총선공약 모집을 해 2,000개가 넘는 정책 제안을 받았지만, 이 정책들을 공약화 하거나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원내 3당인 국민의당 역시 2개 분야 정책을 발표한 게 전부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십여 개의 공약을 내놓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게 그나마 눈에 띌 뿐이다. 선거가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20대 총선용 정책공약집이 나온 건 원외 정당인 녹색당이 유일하다. 그런데 아직 놀라서는 안 된다. 내용을 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새누리당이 여태까지 발표한 공약들의 경우 복지 확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혜택을 확대하되, 보험료는 낮추는 감세 정책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가계 금융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저신용자와 신용불량자의 지원은 확대하고, 경력단절 주부에게도 국민연금 혜택을 늘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막대한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이 정책들의 재원확보 방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정부 재정적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감세를 약속하고 있다. 이번엔 소주가격이라도 올릴 참인가 보다. 더불어민주당은 더 가관이다. 대부분의 정책이 요새 유행하고 있는 카드뉴스로 발표되어 있다. 정책을 몇 줄 슬로건으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더불어성장론’라는 정책보고서 역시 부문별로는 몇 줄의 현황과 대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정당들도 마찬가지다.
정당들이야 앞으로 펴낼 계획이라고 얼버무릴 수 있겠지만, 유권자들은 정당들의 정책을 분석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선거가 다가오면 좀 더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막개발식 정책이나 선심성 공약이 쏟아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기존 선거판을 보면 정책보다는 흑색선전과 막말정치가 모든 이슈를 압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 우리는 결국 또 ‘TV에서 본 사람’ ‘우리 학교 출신’ ‘외모가 괜찮은 사람’을 투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
선거란 자신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대리해 추진할 사람을 찾는 행위다. 대리희망자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알 수 없다면 투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회정치를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보여주는 건 정당들의 의무다. 지금이라도 각 당의 홈페이지와 언론을 통해 공약을 충분히 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시민들은 무언가에 대한 ‘증오’가 아닌 무언가를 향한 ‘정책’으로 투표를 하고 싶다.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너지시민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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