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수동카메라를 들고 다닌 적 있다. 후배에게 빌린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찍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에 현상하고 싶었다. 기억에서 지워진 시간의 물증들이 나중에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하는, 나름 철학적(?)인 동기였다. 두어 달 정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찍어댔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관심을 잃었다. 책장 위에 방치해둔 상태로 수년간 잊고 있던 참이었는데, 며칠 전 후배가 카메라를 찾으러 왔다.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덮개를 열었더니 필름이 한 통 들어 있었다. 기억을 돌이켰으나 뭘 찍었는지 당최 되새겨지지 않았다. 조리개를 만지며 초점을 맞추던 정황은 떠올랐지만, 대상도 장소도 희뿌옇게 지워져 있었다. 뭔가 섬뜩해지면서 지난 몇 년 동안의 행적마저 묘연해지는 기분. 후배가 “현상해 보면 재밌겠다. 탐정놀이 좋아하잖아?”라고 짓궂게 말하곤 자리를 떴다. 탁자 위에 놓인 필름을 한참 바라봤다. 사소했으나 그 순간엔 각별했을 어떤 모습들. 그럼에도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풍경들. 빨리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과 당장은 현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부딪쳤다. 누구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은 심정과 더 시간을 둔 채 진심을 아끼고 싶은 심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적기인지 확신이 안 서는 상황. 당분간 이대로 둘 것 같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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