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연출 예술, 연극은 배우 예술’이라는 해묵은 말이 있다. 이 화면과 저 화면 사이 틈을 통해 서사를 만드는 영화가 촬영과 편집이라는 연출의 영역에서 예술성을 쉽게 성취한다면, 제한된 무대 위에서 서사를 재현하는 연극은 배우의 연기가 작품 성공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20일까지 초연하는 ‘얼음’은 이런 장르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는, 잘 빠진 상업연극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연출가, 극작가로도 잘 알려진 장진의 신작으로 공연 전부터 입소문을 탔지만, 이 공연에서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힘의 8할은 배우에서 나온다.
막이 오르면 반듯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책상에 앉아 반대편을 향해 “혁아~”를 외치며 혼잣말을 계속한다. “유치장에서 잔 사람치고는 모습이 말짱하네. 화장실 가고 싶으면 말하고.” 여섯 토막으로 살해당한 20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고 혐의자로 붙잡힌 18세 소년이 바로 혁이. 소년을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에는 형사1, 2와 ‘혁이’가 등장하지만 무대 위 배우는 형사 역을 맡은 둘뿐이다. 두 사람은 투명인간을 보기라도 한 듯 소년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고 반응하고 심리전을 펼친다. 통속적인 수사 추리물에 모노드라마를 반쯤 걸친(배우가 한 명씩 번갈아 등장하며 취조하는 장면이 많다), 완연히 새롭진 않지만 상업극에서는 다소 독특한 형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 작품의 재미는 연출이 힘을 준 ‘형식’보다 기실 배우에서 나온다. 온순하면서도 꼼꼼한 형사1을 맡은 배우 박호산이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는다. 그가 보이지 않는 소년과 심리전을 펼치는 동안 관객은 저마다의 감정과 이야기, 상상을 보태 소년의 형체를 만든다. 거칠지만 정 많은 형사2를 맡은 배우 김무열은 능글맞으면서 코믹한 연기로 극의 긴장을 푼다. 얼음 섞인 물에 봉지커피를 넣어 아이스커피를 만드는, 다소 황당한 ‘장진식 유머’는 김무열의 투혼에 빚을 지고 있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는 무대로 만드는 건 이들의 연기다.
‘열린 결말’이라는, 통속적이면서 바람직한 결론은 관객의 호오가 나뉠 듯하다. 스릴러와 서스펜스, 유머까지 잘 버무린 연기에 심취하다 정점에서 맥이 탁 풀리며 끝을 맺는다. 형사1에 이철민, 형사2에 김대령이 더블캐스팅됐다. (02)766-6506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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