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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따라 떠오르는 ‘그때 그 물건’

입력
2016.03.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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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만 있으면 인공위성도 만들어 주는 곳.’ 도깨비 같은 잠재력 덕분일까, 세운상가는 별명조차도 ‘급’이 달랐다. 한때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그곳에서 상인과 흥정을 벌이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었고 조금씩 풍요로워지는 우리네 삶을 실감하는 기회였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현대화의 상징에서 거대한 실패작으로 주저앉은 세운상가에 지금 재생의 구름다리가 놓이고 있다. 서울시는 얼마 전 2019년 완공을 목표로 세운상가 재생사업 ‘다시ㆍ세운프로젝트’ 에 착수했다.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그 때 그곳에 진열된 물건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 봤다. 우리 살아온 반세기와 세운상가의 흥망성쇠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석유풍로(왼쪽)와 흑백TV
석유풍로(왼쪽)와 흑백TV

① 석유풍로 및 흑백TV : 1960년대 말~1970년대 중반

국내 최대 쇼핑센터… 일제 풍로 인기몰이

필요할 때만 불을 피울 수 있는 석유풍로는 연탄화덕을 대체한 혁신적인 조리기구였다. 정부의 연료전환정책에 힘입어 일본 제품이 대량 수입되면서 ‘곤로’라는 일본식 표현도 함께 들어왔다. 일제에 비해 저렴한 국산은 화력이 약하고 고장이 잘 났다. 당시 석유풍로를 주로 판매한 곳이 서울 시내 백화점과 세운상가였다. 1967년 준공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국내 최대 쇼핑센터로 각광받은 세운상가는 취급 물품만 봐도 당시 생활상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품목을 판매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세운상가의 또 다른 대표 상품은 흑백 TV.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과 뮌헨올림픽 덕분에 세운상가에서는 돈 주고도 TV를 사지 못하는 품귀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70년대 나온 전축
70년대 나온 전축

② 고급 오디오 : 1970년대 말

아파트에 고위층ㆍ교수ㆍ연예인 거주

세운상가 아파트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고위공직자나 교수, 연예인이 많이 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강남 개발이 진행되고 소공동에 롯데백화점 본점이 들어서면서 하락세를 걷기 시작한다. 다만, 삶의 질 향상과 더불어 오디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세운상가에는 오디오 제품을 취급하는 점포가 늘었다. 당시 세운상가는 주로 외제 중고품이나 국산 완제품을 취급했는데 조합에 따라1,000만원을 넘어서는 제품도 있었다. 당시 턴테이블의 바늘 교체시기를 알려 주는 장치를 개발할 만큼 오디오 관련 기술력이 뛰어났고 최근까지도 각종 음향기기를 다루는 전문 판매상들이 그 명성을 잇고 있다.

컴퓨터(왼쪽)와 전자오락기
컴퓨터(왼쪽)와 전자오락기

③ 컴퓨터 및 전자오락기 : 1980년대 초

PC자체 제작… 점포들 우후죽순

국내 유명 가전업체도 손을 못 대던 퍼스널 컴퓨터를 제작, 판매하기 시작한 곳이 세운상가다. 비록 외국 제품을 모방하고 조립하는 수준이었으나 기능면에선 외국 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1984년 150여개의 점포가 들어설 정도로 호황을 누렸고 업자들은 국내 컴퓨터 대중화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컴퓨터와 함께 전자오락기를 취급하는 업체도 많았는데, 당시 2~3평 규모의 점포 130여곳에서만 연간 1백만대 이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 정부의 전자오락실 양성화 발표 직후 전자게임기 산업을 준비하던 일부 기업들이 이곳에서 전문 기술인력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일본 소니사의 워크맨
일본 소니사의 워크맨

④ 워크맨 : 1980년대 중반

외제 중고품 사다가 손질해 되팔아

드라마 ‘응답하라1988’에서 덕선이는 장기자랑 1등 상품인 ‘마이마이’를 받기 위해 피나는 댄스 연습을 했다. 포켓에 넣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는 당시 중고생들이 가장 갖고 싶은 전자기기였다. 특히, 일본 소니(SONY)사의 제품 ‘워크맨’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칭할 정도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전자도깨비 시장’으로 불리던 세운상가의 중고 전자제품 판매상들은 해외파견 기술자나 외국인 등을 통해 외제 중고품을 사들인 후 깨끗이 손질해서 되팔았다. 비록 중고품이지만 취급점마다 A/S를 해주었고 지금도 부품이 없어 공식 A/S센터에서도 수리 못하는 수십년 된 워크맨을 수리해 낸다.

레코드판(왼쪽)과 음란서적
레코드판(왼쪽)과 음란서적
VHS 비디오 테이프
VHS 비디오 테이프

⑤ 불법복제 음반 및 음란물 :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골목서 중고생에 “좋은 것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음반 도매점 20여 곳이 세운상가에 몰려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매상보다 20% 정도 싸게 음반을 살 수 있었는데, 라이선스판은 2,500~2,800원, 국산 원판은 1,000~2,000원 선이었고 개당 500~1,000원 내외의 저질 복사판도 흔했다.

1987년 개장한 용산 전자상가로 전자제품 점포들이 옮겨가던 이 시기 세운상가는 음란비디오가 가장 공공연히 거래되는 곳으로 통했다. 일명 ‘비디오골목’ 판매상은 교복차림의 학생들에게까지 “좋은 것 있는데…” 라며 접근했고 경찰의 일제단속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2,000~2,500원짜리 국산 에로영화 복제판부터 일제, 미제, 스웨덴제 포르노 비디오까지 다양했고 최고 7만~8만원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돈만 빼앗겼다거나 구입한 음란테이프를 재생해 봤더니 드라마 전원일기가 나왔다는 경험담도 당시 흔했다.

러시아 등지에서 밀반입된 권총
러시아 등지에서 밀반입된 권총

⑥ 총기류 등 각종 밀거래 : 1990년대 중ㆍ후반

세운상가서 불법ㆍ탈법 아이템 거래도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세운상가는 음란물을 비롯해 도청기, 총기류 등 불법, 탈법 아이템을 거래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연쇄납치 살해로 전국을 충격 속에 몰아 넣은 지존파 사건 당시 세운상가에서는 러시아제 총기류를 취급하는 브로커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지존파에게 기관총을 구입해 주기로 한 남성 역시 세운상가에서 활동한 경력을 내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골프예약을 위한 자동 발신 전화기를 불법 개조해 팔거나 장당 20만~30만원에 주민등록증을 밀거래 하다 적발된 경우도 있었다.

자동차 키, 만년필, 라이터 모양의 초소형 카메라(왼쪽부터)
자동차 키, 만년필, 라이터 모양의 초소형 카메라(왼쪽부터)

⑦ 첨단 몰카 및 도청기 : 2000년대 이후

라이터ㆍ만년필 모양으로 몰카 진화

1980년대부터 이미 외국산 고성능 도청기를 취급해 온 곳이 세운상가다. 불륜 증거 확보나 입시 부정, 정치적 목적 등에 악용되어 온 도청장치는 2,000년대 들어 크기는 작아졌고 성능은 향상됐다. 사생활 훔쳐 보기용 초소형 카메라 역시 세운상가에서만 1만여대가 유통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엔 자동차 키나 라이터, 만년필 모양의 몰카 장비를 10만원 정도면 쉽게 구입할 수 있다. 2010년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때는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디가우저(데이터 완전 삭제장치)를 보유한 세운상가 업체에 증거인멸을 의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 에피소드 모음 = 그땐 그랬지!

#1 인터폰 설치하면 ‘앉아서 감독 가능’ 홍보 (1960년대 말)

자동교환 장치가 내장돼 교환수가 필요 없는 첨단 전화기를 세운상가에서 판매했는데, 각 부서에 설치해 두면 사장은 앉아서 많은 부하직원들을 지휘, 감독할 수 있다며 제품을 홍보했다.

#2 잘 나가던 흑백TV, 중고 돼서 돌아오다 (1980년대 초)

1980년대 초 컬러TV시대가 열리면서 흑백TV가 일제히 중고품 시장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때 흑백 TV를 가장 많이 팔았던 세운상가는 서울 및 중부 지방 중고TV의 집산지가 됐다. 대당 10만원쯤에 팔려간 흑백 TV가 단돈 3,000원~5,000원에 세운상가로 돌아왔다.

#3 컴퓨터 처분하려다 절도범으로 오인 (1980년대 말)

컴퓨터교육 의무화를 앞두고 많이 팔린 8비트 컴퓨터는 수명이 그리 길지 못했다. 1989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임모(46)씨는 이미 구닥다리로 전락한 컴퓨터를 처분하기 위해 세운상가를 찾았다. 모니터와 본체를 보자기에 싸 들고 점포를 기웃거리며 가격을 흥정하는데 업자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다가왔다. 그가 제시한 가격은 50만원.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따라가보니 다름아닌 경찰서. 중년 남성은 당시 불법 복제와 장물 거래의 온상이던 세운상가에서 잠복근무 중인 형사였다. 임씨는 결국 학생부 선생님과 부모님까지 경찰서에 소환돼 야단을 맞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4 광주비디오ㆍ아침이슬도 팔았다 (1980년대 중ㆍ후반)

세운상가 비디오골목이 음란물만 취급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가나 명동성당 등에서 상영하던 일명 ‘광주비디오’도 이곳에서 은밀하게 유통됐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외국TV의 뉴스 화면을 편집한 이 비디오에는 구타당하는 시위대와 전남도청에서 오열하는 희생자 유족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민주화를 향한 시대의식의 발로인지 돈 되는 건 다 파는 상술의 일환이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광주비디오 역시 세운상가의 취급목록 중 하나였다.

금지곡 음반도 구할 수 있었는데 ‘아침이슬’, ‘작은 연못’ 등이 그대로 수록된 오리지널 앨범이 장당 20만~40만원에 거래되고 ‘빽판(복제판)’ 역시 8만원 정도에 살 수 있었다. 외국 음반 중 금지곡이나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프로그레시브 로크, 아트 로크 음반을 구하기 위해 세운상가를 찾는 음악 마니아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5 복돌이의 전설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세운상가는 게임 무단복제의 메카였다. 일본에서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면 세운상가의 일명 ‘복돌이(복제기술자)’들은 회로를 그대로 그려가며 복제를 했다. 무단복제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본 게임업체들은 IC(집적회로)의 플라스틱 커버를 제거하면 회로까지 떨어져나가는 장치로 복제를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복돌이들은 IC를 오븐에 넣고 불규칙적으로 열을 가하면서 화학약품을 분사하는 식으로 플라스틱을 녹여 회로 구조를 파악했다고 한다. 이후 더 복잡한 멀티플랫폼 IC 마저 복제해 냈지만 일본정부의 계속적인 압박과 집중 단속으로 인해 복돌이는 국내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운상가의 복돌이 중 상당수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현지 복제 기술 향상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출처=한국일보 자료사진, 인터넷 커뮤니티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그래픽=강준구기자 wldms4619@hankookilbo.com

신재훈 인턴기자(세종대 광전자공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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