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끈 달아오른 미국 대선 후보 레이스의 최대 관심인물은 아무래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다. 현지에서도 괴짜 정도로 취급하다가 아이오와코커스 이후 다들 ‘이건 아닌데 이상하다’는 심정으로 그의 거침없는 진군을 놀랍게 지켜보는 분위기다. 초반에 동반 돌풍을 일으켰던 민주당 버니 샌더스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인 것과 달리 그는 49%의 지지율(29일 공개된 CNN 전국 여론조사)로 힐러리 클린턴과 본선에서 맞붙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무슬림을 추방하고 멕시코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자는 그의 주장은 막말을 넘어 도발에 가깝다. 그런데도 유권자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미국 주류 매체들은 ‘워싱턴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반란’ 내지는 민주당의 샌더스와 한데 묶어 ‘아웃사이더 돌풍’ 정도로 분석해 왔다. 집권하면 유력 일간지를 손보겠다는 그의 협박에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의 지목된 매체들이 “트럼프가 후보가 되면 공화당이 위험하다”면서 협공을 벌이고 있지만 트럼프의 기호지세를 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신대륙에서 트럼프의 위험한 배제정책이 시험대에 오른 사이 구대륙에서는 더욱 심각한 봉쇄정책이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 테러와 중동 난민으로부터 자국과 자국민을 지키겠다며 국경을 꽁꽁 틀어막는 쇄국의 장벽이 곳곳에서 높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역내 자유통행 보장을 명시한 ‘셍겐조약’ 위반이라는 논란도 없지 않지만 지난해 파리테러 이후 유럽 전역으로 번지는 이슬람 과격단체의 발호를 우려하는 각국의 봉쇄조치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자유통행의 보호막을 악용한 테러분자들이 난민들 속에 묻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난민들의 유럽행 길목을 차단한 발칸국가들의 장벽설치는 문제가 다르다. EU 회원국인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슬로베니아ㆍ크로아티아ㆍ불가리아ㆍ알바니아ㆍ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ㆍ코소보ㆍ마케도니아ㆍ세르비아ㆍ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 9개국이 동의한 ‘발칸장벽’은 중동 난민에 공동 대응키로 한 EU합의에 우선 위배된다. 이 가운데 많은 국가들이 독립 과정에서 심각한 내전을 겪었고 와중에 상당수 국민이 시리아ㆍ리비아 난민들처럼 유럽 각지를 전전했던 아픈 경험을 공유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정(非情)도 이런 비정이 있을까 싶다. 그리스를 통해 유럽으로 가려다 터키 해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에일란 쿠르디의 모습에 애도를 표하던 인류애적 연대는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인가.
양(洋)의 서쪽에서 벌어지는 두 장면은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보수주의 사조(思潮)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상화한 경제위기와 점증하는 테러 위기 속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움직임은 어쩌면 인간 본능과 같은 기제일지도 모른다. 장기화한 경기침체 속에 아베 극우 보수 정권이 2020년까지 집권할 것이라는 일본과 경기하락 국면에서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시진핑이 언론통제의 고삐를 죄며 체제유지에 몰두하는 중국 모두, ‘뉴노멀(new-nomal,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롭게 떠오르는 표준)’이 된 보수주의의 또 다른 단면이 아닐까.
우리라고 다를 바 없다. 통진당 해산을 기점으로 보수주의 깃발을 든 박근혜정부의 행진은 거침이 없다. 전체주의적 위험이 있다는 숱한 우려 속에서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으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울분을 뒤로 한 채 일본과 불가역적인 위안부 협상도 일방적으로 끝내 버렸다. 국민의 기본권을 심대하게 침해할 소지가 다분한 테러방지법의 운명도 불을 보듯 뻔하다.
박근혜정부는 이전 이명박 정부의 시장지향적 보수와도 다르다. 분명한 이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제3의 중재자가 개입할 소지도 거의 없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대안세력의 부재다. 4월 총선에서 분열로 패배를 자초하고 있는 야당의 모습을 보노라면 보수정권의 10년 연장을 피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김정곤 국제부장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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