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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어느 눈 내리던 날

입력
2016.03.0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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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이른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운구차에 오르기 위해 장례식장 문을 나선 오전 9시께의 아침하늘은 더욱 굵은 눈을 토해냈다. 마치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려는 듯 걷힐 기미 없는 눈발 사이에서,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을 오가며 처연하게 가라앉는 가슴을 내내 부여잡았다. 아직도 영정사진 속 망자가 내 어릴 적 추억의 일부를 아름답게 채워주신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탓이다.

외삼촌은 참 선한 분이셨다. 지지리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1남 4녀 중 한 형제로 태어나 다시 2남 3녀를 둔 가장으로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늘 책임감 하나로 온갖 일들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교육자로 정년퇴임까지 하셨지만 그보다는 늘 포도밭을 일구시던 모습이 더 많이 떠오른다. 그만큼 당신은 농사꾼으로서 외갓집 살림의 대부분을 맡아 가족들의 안온한 삶을 꿈꾸고 살피는 일을 업으로 삼으셨다. 세월이 흘러 이제 고된 노동을 내려놓고 안식의 시간을 원하신 것일까. 외삼촌은 홀로 농한기 밭을 살피러 나가셨다가 당신이 그토록 아끼던 포도나무 아래 쓰러져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셨다.

방학 때가 되면 외삼촌은 우리 형제들을 데리러 일부러 오시곤 했다. 지금이야 두 시간이면 가는 길이지만 외가가 있는 충북 옥천군과 우리 집인 충남 부여군까지는 당시 교통편이 아주 불편했다. 여러 차례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중간에 강을 건너기 위해 통통배에 몸을 실어가면서 하루 온종일 걸려야 아주 촌구석인 우리 동네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외삼촌은 차멀미까지 하는 우리 철부지 형제들을 이끌고 다시 그 먼 길을 돌아 외가로 향하셨다. 그때 맞잡았던 당신의 손은 얼마나 따뜻했던지. 생각해보면, 집안의 생계를 도맡아 힘겨워하시던 우리 엄마이자 당신의 큰누이와 일손을 나누려는 마음으로 그 먼 길을 오가셨던 것이 아닐까. 외삼촌은 그렇게 참 깊은 심성을 지닌 분이셨다.

운구차는 본가가 있는 읍내를 들렀다가 장지가 있는 원래의 외가 터로 향했다. 너무 오랜만에 들른 외가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막은 ‘푸세식’ 뒷간도, 가마솥 끓이던 부엌 안 두 개의 아궁이도, 어릴 때는 몰랐지만 이제 내 키 높이보다 낮은 방안 천장의 모습도 대부분 그대로였다. 특히 한 여름 더위를 씻기던 물 펌프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더 이상 쓸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펌프를 보며 잠시 울컥해지기도 했다. 외삼촌, 외할머니께서 ‘등목’의 시원함을 알려주신 추억이 가득한 물 펌프.

장례절차에 따라 잠시 시간이 있는 동안, 나는 조금 전까지의 침울한 분위기를 털어내고 잠시 기억의 바다에 잠겨 들었다. 오히려 고향에 비해 외가에 머물 때의 어릴 적 추억이 내게는 너무 아름답게 남아있다. 참기름 향이 항상 배어있던 외할머니는 무한사랑의 기품으로 나와 형제들을 품어주셨고 슬레이트 지붕 뒤편으로 작은 둔덕을 이루고 있는 너른 밭에는 포도와 참외 수박 등이 여름방학을 맞은 우리들의 입과 배를 채워주었다. 원두막에서 내려가 풀밭을 뒹굴다가 쐐기에 물려 울던 기억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잘 익은 과일을 잘라주시던 외삼촌의 그 두툼한 손바닥까지.

한번 찾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지만, 외가가 품고 있는 모든 것에 춤을 추면서 멀미의 고통을 견디며 오가던 즐거웠던 기억은 지금도 너무 소중하기만 하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빠와 딸로 살아요….”

외사촌 큰누이의 안타까운 울음소리에 번득 정신이 들고, 원두막이 있던 자리의 영원한 안식처에 드신 외삼촌은 이제 먼 길을 떠나셨다. 어릴 적 추억의 가장 소중한 일부를 나눠주신 외삼촌의 명복을 고이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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