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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읽고 세상을 보니 인생이 달라지네요

입력
2016.03.0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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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전문기자 출신인 초대 회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상금 쾌척

책 구입ㆍ저자 초빙해 독서모임 탄생

1999년부터 매달 만나 200회 훌쩍

교통공학 전공 찾은 경찰공무원

그림으로 진화론 표현한 60대 등

과학책 읽기 계기로 새 삶 그려가

과학독서아카데미 회원들이 23일 한국일보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과학독서아카데미 회원들이 23일 한국일보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당신이 옳았어요, 아인슈타인.”

중력파 검출 덕분에 세상이 온통 떠들썩하다. 100년 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이론적으로 예측한 일이 55년 동안의 기나긴 노력 끝에 실제로 관측되면서 마침내 현실로 변했다. 신문에 담긴 뉴스를 보면서 인간적 상상의 위대함에 대한 경탄, 중력파 시대가 열어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온 우주의 비밀을 무차별하게 벗겨가는 과학의 힘에 대한 경이 등이 가슴에 물결을 쳤다.

장대한 세계를 바라본 한 인간의 감격과, 그 감격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어서 느끼는 두려움이 하나로 섞인 마음을 ‘숭고’라 한다면, 과학은 평범한 시민들한테 항상 숭고하다. 무지(無知)의 영역에서 지(知)의 영토로 넘어오지 못하고 미지(未知)의 두렁으로 남아 있다. ‘과학독서아카데미’는 이 두렁에 우뚝 서서 시민들을 과학의 대지로 안내한다. 전 회장이자 운영위원인 이덕환 교수가 운을 뗀다.

“저희 모임은 책 읽기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과학의 가치를 함께 알아가려고 책을 읽습니다. 독서보다 과학에 무게중심을 두는 거죠. 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높이고, 과학의 합리성을 생활화하는 게 목적입니다. 책에는 시민들이 알아야 할 과학지식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의 가치를 알리는 데에는 책을 통로로 삼는 게 가장 훌륭합니다. 과학자와 시민이 함께 모여서 과학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산파는 이용수씨…매달 한 번 200회 ‘기적’

모임의 산파는 과학 전문기자를 지낸 이용수 서울낫도 대표다. 과학 전문기자의 길을 열어간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이 대표는 신문사 은퇴와 함께 과학 발전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상을 받는다. 그때 상금이 1,000만 원. ‘과학 대중화’를 소명으로 받은 그는 이 상금을 쾌척해 책 구입 자금으로 쓰라면서, 한 달에 한 차례 과학책을 읽고 저자를 초빙해서 이야기 나누는 시민 독서 모임을 제안한다. 이에 박택규, 서정돈, 신종오, 오세정, 이덕환, 홍욱희 등 전문가들이 뜻을 뭉치면서 과학 독서운동의 새 아침이 열린다.

씨앗 없이 피는 꽃이 있으랴,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도 결국 어딘가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루쉰의 글이 생각난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고 그 앎을 길로 바꾸어간 이들이 없었다면, 역사라는 지도에는 혼돈이 있을 뿐 어떠한 길도 새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덕환 교수가 과거를 더듬었다.

“대담한 분이죠. 당시 을지로에 한국전력 본사 건물이 있었습니다. 모임 장소가 마땅하지 않자, 이용수 초대 회장님이 불쑥 거기로 들어가 사장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을까요. 모임 취지를 들은 후 한전에서 무료로 회의실을 빌려주었습니다. 한 해 만에 모임이 커지면서 장소가 비좁아서 옮길 때까지 잘 썼습니다. 이 회장님 사모님 생각도 나네요. 모임 때마다 50인분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져오셨습니다.”

과학독서아카데미 첫 모임은 1999년 5월이었다. 지난해 12월에 200회 모임을 할 때까지 한 달에 한 번, 매달 셋째 화요일에 열여섯 해 동안 거의 빠짐이 없었다. 장소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 이벤트홀이다. 고정 독자층이 옅기로 이름난 과학책 분야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모임을 이어온 것 자체가 ‘미러클’이다. 지금 회장인 여인형 교수가 이야기를 받는다.

“책 읽는 것 자체는 개인만 만족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함께 읽으려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과학 지식과 정보를 시민들과 공유해 확산하는 데 목적을 둔 만큼, 단지 과학책을 읽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의미와 맥락을 짚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저자 또는 관련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토론자를 배치해 심도 있게 논의를 진행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강의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시민들의 흥미를 유발해서 책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책을 읽고 미흡했던 부분을 강연이나 질의응답을 통해 확인하거나, 강연을 듣고 나서 현대과학의 필수지식에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아주는 거죠.”

독서 모임 경험이 과학교육에 큰 도움

이 모임에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규칙도 없다. 전화나 문자를 보내 참석을 다짐받는 일도, 소감이나 후기를 올리라고 재촉하는 일도 없다. 모여 과학 이야기하는 것만이 의무이고, 각자 삶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등록회원은 200여 명에 이르며, 평소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40명 내외다. 대중적 주제를 정하면 참석자 수는 급격히 늘어난다. 읽을 책은 운영위에서 정해 일괄 구입한 후, 그 전 달 모임에서 나누어준다. 한 달 동안 책을 읽고 강연자와 나눌 내용을 생각해 오라는 뜻이다. 성산중 교장으로 은퇴한 과학저술가 정근화씨가 말을 붙인다.

“물리교사로 평생 가르치면서 살았는데, 과학을 더 다양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임에 나왔습니다. 과학은 인생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인데도, 학교의 과학교육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3, 4학년까지는 아이들 관심이 대단한데, 그 이후 급격히 멀어집니다. 과학이 ‘재밌다’에서 갑자기 ‘어렵다’로 바뀌는 거지요. 이럴 때 부모들이 조언을 해주면 그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독서모임 같은 데서 부모들이 먼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과학 교육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치열해진다. 과학이 아니라 과학 개념의 분류학을 가르친다든지, 최신 정보가 아니라 낡아빠진 지식에 얽매여 있다든지, 생활에 필요한 과학은 정작 배제된다든지 하는 말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초등학교 교사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에서 과학책을 주로 골라주는 유연정씨가 수습에 나선다.

“그래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학교의 과학 교육은 과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큰 목표입니다. 따라서 교과서만으로 부족합니다. 교과서를 공부하고 수업 듣는 일은 길잡이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이 지식의 균형을 잡고 시야를 넓히려면 반드시 과학책 읽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아이들 과학책을 읽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한 독서를 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증이 있었는데, 모임에 나온 후 비를 맞은 듯했습니다. 아이들 책을 고르는 눈도 더 깊어졌지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윤영신씨가 손뼉을 마주친다. “동료 교사 대신 참석했다가 모임에 푹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읽던 책을 전문가가 짚어주고 때때로 잘못까지 지적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수업자료 등을 준비할 때 배경 지식이 늘어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과학독서아카데미 회원들은 한 해 두 차례 과학의 현장으로 답사를 떠난다. 지난해 가을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으로 여행을 간 회원들이 현장 강의를 들은 후 기념촬영 했다.
과학독서아카데미 회원들은 한 해 두 차례 과학의 현장으로 답사를 떠난다. 지난해 가을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으로 여행을 간 회원들이 현장 강의를 들은 후 기념촬영 했다.

“과학책 읽고 새로운 가능성에 눈 떴어요”

누구의 삶이든 접혀진 채 보이지 않는 가능성이 무수히 존재한다. 무언가를 마주쳐 촉발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삶의 지층 밑에 머무른다. 살아온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살아갈 평탄 속에서 생의 봄날은 조금씩 지나간다. 같이 읽기는 때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촉발한다. 평소라면 전혀 읽지 않았을, 모임에 나와 우연히 마주친 책이 둔덕을 만들면서 생의 물줄기를 다른 쪽으로 흐르게 한다. 경찰공무원으로 일하는 정승희씨가 말한다.

“혼자 과학책을 읽으면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모임에 나오면서 활발한 의견 교환을 통해 책의 감동을 더 오래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중ㆍ고교 때 이 모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과학자가 되었을 거예요. 모임에 나오면서 제 인생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미래 보고서 2010~2100’이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임무를 맡아야 할까 고민할 때였어요. 그 책에서 교통의 미래를 다룬 내용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눈이 틔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슴없이 교통공학을 전공으로 택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비인기직종이지만 미래가 열려 있으니까요.”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만나 접혀 있던 가능성이 펼쳐지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으로부터 접혀 있던 기억들이 풀려나 이야기의 기나긴 연쇄를 이루는 것을 느낀다. 책을 읽는 것은 이처럼 자유의 무한한 촉매들과 마주치는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낸다. 10여 년 전 모임에 나와 뒤늦게 과학책을 읽기 시작한 강영자씨가 말한다.

“과학 독서를 안 했으면 드라마나 보며 지냈을 거예요. 잘 해야 옛 이야기를 뒤적였겠죠. 과학책을 읽으면서 늘그막에 새로운 삶도 시작했어요. 진화론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아 본문에 있는 개 그림을 따라 그려봤어요. 기적처럼 이해가 되는 거예요. 책을 읽을 때마다 그림을 그렸죠. 주기율표도 그렸는데,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림 그리는 게 점점 재밌어져서, 지금은 민화를 정식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이순의 나이에 과학책 읽기를 시작해 삶을 다시 그려가는 모습이 씩씩하다. 읽기를 통해 과학을 시민사회로 퍼뜨리려 했던 한 사람의 정열이 여기저기에서 꽃 피우는 중이다. 아름답다.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처음 읽기 좋은 과학책 10종

오늘날 시민 교양의 핵심에는 과학이 있다. 과학에 대한 지식 없이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은 분야가 아주 많고, 분야마다 처음 읽기 좋은 책이 모두 다르다. 과학독서아카데미에서 함께 읽었던 200권 넘는 책 중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학, 과학사, 과학철학, 의학 등 분야별 입문서를 추천 받았다.

클레망스 강디요, 인생은 오묘한 수학 방정식(김세리 옮김, 재미마주, 2010)

최무영,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2008)

여인형, 퀴리부인은 무슨 비누를 썼을까?(2.0, 생각의힘, 2014)

김성호, 동고비와 함께한 80일(지성사, 2010)

김웅진, 생물학 이야기(행성B이오스, 2015)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홍욱희 옮김, 에코리브르, 2009)

빌리 우드워드, 미친 연구 위대한 발견(김소정 옮김, 푸른지식, 2011)

기울리아 앤더스, 매력적인 장(腸) 여행(배명자 옮김, 와이즈베리, 2014)

제래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2005)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덕환 옮김, 까치, 2003)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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