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스코리아 진 이민지(25)씨가 “선배님”하고 살가운 인사를 건네자 인자한 미소의 한 여성이 답했다. “선배님은 무슨, 엄마 같지 뭐. 아니 할머니인가? (웃음)” 1963년 준 미스코리아 진(4등에 해당) 김태희(73)씨의 말이었다. 나이로는 48세, 미스코리아 햇수로는 52년의 간극을 뛰어넘으며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다.
이씨와 김씨가 간단한 대화를 나주자 옆에 선 유영애(66)씨가 한 마디 거든다. “선배님은 어쩜 늙지도 않으세요? 우리 후배님을 보니 참 예쁘다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를 않네요.” 유씨는 1970년 미스코리아 진이다.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 모인 세 사람은 무려 48년이란 세월을 사이에 두고도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공통점 하나로 금세 웃음꽃을 피웠다. 70대, 60대, 20대가 모였는데 미스코리아라는 화제는 세대 차이를 없애기에 충분했다.
김씨는 당선 직후 결혼해 평범한 가정주부의 길을 걸어왔다. 유씨도 크게 다르진 않다. 지난해 미스코리아 진이 된 뒤 1년 동안 쉴새 없이 미스코리아의 이름으로 살아온 막내 이씨는 새로운 인생 출발점에 서 있는 상태다. 나이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른 세 사람은 그래도 미스코리아의 영광을 공유하고 있다. “지금도 고향(경기 의정부시)에 가면 주민들이 ‘미스코리아 왔다’며 반긴다”는 유씨의 사례는 김씨와 이씨에게도 일어날 만한 일이다. 처지는 각기 다르지만 수십 년 전의 아득한 과거의 일과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 사람은 미스코리아에 대한 각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차례로 공유했다.
이들은 미스코리아 대회를 바라보는 세간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과거에 비해 미스코리아 위상이 낮아진 건 분명하다”며 안타까워하면서 미스코리아를 꿈꾸는 지원자들에게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이라는 의미와 자부심을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대회와의 첫 인연이 궁금하다.
김태희(김)=“대회에 출전하기 전까지 미스코리아 대회를 TV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행정구역으로)충남 대전시에 사는 친구가 ‘네가 꼭 나가야 한다’며 나 대신 충남 예선 신청을 해버렸다. 대학(숙명여대 영문과) 1학년 때였다. 대회 시작 3일을 남겨놓고 부랴부랴 대전으로 내려갔다. 대회 때 입을만한 마땅한 원피스나 수영복도 없어 급하게 구입해서 출전했다.”
유영애(유)=“나 역시 대학(숙명여대 무용과) 1학년 때 인연을 맺었다. 당시 봉사클럽에 활동 중이었다. 지인이 내가 살던 경기 의정부 지역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면 상금 3만원에 금까지 준다고 하더라. 봉사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뒤도 안 돌아보고 출전했다(웃음).”
이민지(이)=“대학(성신여대 성악과)을 졸업하고 24세에 참가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미스코리아 대회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스코리아 대회 출전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당시에는 학업과 병행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미스코리아가 되겠다고 하니 부모님도 ‘나이 들어서 어딜 나가냐고’ 하셨다(웃음). 그런 말을 들으니 더 도전해보고 싶더라.”
-당선 뒤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
김=“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오빠가 아버지 같았다. 오빠가 무서워 대전도 몰래 내려갔고 ‘김혜원’이란 가명으로 출전했다. 미스 충남 진으로 당선된 소식을 알게 된 오빠가 ‘이상한 남자들 꼬이기 전에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며 야단을 치더라. 부상으로 받은 고급 옷감 한 필과 화장품 세트를 손에 들고 끽소리 못 하고 바로 올라갔다(웃음).”
유=“가족들에게 숨기고 출전했는데 밤 10시 방송 뉴스에 미스 경기 진이 됐다는 소식이 나와 그 때 들통이 났다. 가족들은 난리가 났지. 오빠한테 혼난 것만 생각하면 어휴…(웃음).”
-미스코리아는 고된 합숙과정이 유명하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김=“당시에는 지역 예선 진들만 합숙에 참가해 충남 대표는 나 혼자였다. 다들 화려하고 세련된 사람들만 모아 놓으니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더라. 밥도 늘 혼자 먹었다. 그러다 우정상을 뽑는다고 투표를 하는데 나만 빼고 모든 지원자들이 다 자기 이름을 썼더라. 나만 미스 경북 진 이름을 써서 이 아가씨가 단 2표로 우정상을 탔다(웃음). 지금 생각하면 참 순진했다.”
유=“일주일 정도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합숙을 했다. 당시만해도 의정부는 시골이어서 서울에 오니 너무 위축되더라. 세련된 서울 아가씨들에게 기가 눌렸던 거다. 화려한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들 배 나온다고 아침 식사도 안 할 때 나는 촌스러워서 늘 밥 한 그릇을 뚝딱했다(웃음). 또 서울 참가자들은 밤마다 놀러 나가는데 나는 길을 잃을까 무서워 무조건 숙소에만 있었다.”
이=“지난해 합숙과정은 6주였다. 이 기간 동안 헤어 메이크업, 군무, 장기자랑, 걷기, 말하기, 와인 수업 등 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을 쌓기 위한 다양한 교양 수업도 진행됐다. 참가자로서는 가장 힘들 과정이지만 미스코리아로 거듭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유=“숙명여대 학생처장과 과 조교가 합숙하던 숙소로 찾아와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갈 거면 학교를 자퇴해야 한다’고 하더라. 바로 직전 해(1969년) 미스코리아 진 역시 숙명여대 출신이었는데 기혼자인 걸 속이고 출전했다가 나중에 미스코리아 자격이 박탈된 사건이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니 학교에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퇴하라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당황한 학생처장이 유영애가 선발되면 총장님에게 잘 말해줄 테니까 열심히 하고 오라더라. (웃음). 우는 모습이 짠했나 보다.”
-미스코리아의 위상이 예전만 못 하다는 평가도 있다. 여성의 성 상품화란 비판도 있다.
유=“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스코리아 대회는 국민적인 행사였다. 온 가족이 모여 미스코리아 대회 방송을 보며 즐거워하던 시절이 있었지 않나.”
김=“미스코리아로 선발되면 ‘미스 유니버스’라는 세계적 대회에 출전한다. 국위선양의 의미로 미스코리아 대회를 봐야 한다. 어찌 보면 국가대표를 뽑는 거나 마찬가지다. 미스코리아 참가자들 스스로도 내가 한국을 대표하는 미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 떳떳해져야 한다.”
이=“대부분의 미스코리아들이 모범적인 삶을 살지만 아주 일부 미스코리아 출신들이 구설에 오르기도 해 부정적인 면이 부각된 듯 하다. 미스코리아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공인이다. 후배들의 귀감은 물론 국민들에게까지 모범을 보여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나 역시 지금의 위치에서 나를 더 발전시켜 가라앉은 미스코리아 분위기를 다시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다.”
김=“물론 참가자들의 생각도 성숙해져야 한다. 주변에서 예쁘다는 말만 듣고 아무 것도 모른 채 너무 어린 나이에 출전하기보다 자신의 가치관을 충분히 세우고 대회에 참가한다면 외부에서 보는 평가나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
-미스코리아를 꿈 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달라.
이=“미스코리아가 되려고 하면 연예인 하려고 그런다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미스코리아를 통해 연예인을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진로 설정이나 피나는 노력 없이 ‘나는 예쁘니까 미스코리아가 되고 그러면 연예인 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은 위험하다. 당선이 된다고 해도 1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일수록 진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김=“온 세계에 한국의 미(美)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자만심은 금물이다. 미스코리아 대회가 끝나면 바로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고 대접 받기를 원하는 순간 자신을 망치는 길이다.”
유=“나는 다시 태어나도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다. 감사하게도 미스코리아였기에 누린 것들이 많다. 하지만 두 분이 말했듯이 ‘내가 미스코리아인데’라는 생각을 갖는 순간 전체 미스코리아를 욕보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늘 젊음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후배 미스코리아들의 앞길을 뒷바라지해야 한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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