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가이드가 태국인 인솔? 언어 달라도 단속 근거 없는 현실
시정명령·과징금 등 솜방망이 처벌
여행사·면세점은 문자메시지로 단속정보 알려주며 불법 부추겨
25일 오전 태국인 관광객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 한 대가 서울 용산의 A면세점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던 관광객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서울경찰청 관광경찰대 소속 윤지영 경장이 가이드로 보이는 여성 K씨에게 다가섰다. 자격증을 보여 달라는 윤 경장의 요청에 K씨는 어눌한 영어로 “자격증은 없지만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명소를 돌며 관광객들을 인솔했다”고 둘러댔다. 알고 보니 그는 관광비자로 입국한 태국인 무자격 가이드였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불법ㆍ탈법을 일삼는 무자격 가이드가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이 그릇된 정보로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탓에 한국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다시 찾고 싶지 않은 나라’로 만들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관광경찰대가 19~28일 집중 단속한 결과, 이 기간 적발된 관광 가이드의 불법 행위는 60건에 달했다. 특히 ‘시팅(sitting)가이드’는 무자격 가이드가 활개치도록 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시팅가이드는 현지인 인솔자(투어리더)가 단속되지 않도록 자격증을 제시하되 실제 업무는 하지 않는, 말 그대로 버스에 앉아만 있는 한국인 가이드다. 보통 경력이 적거나 일감이 줄어든 가이드들이 시팅 가이드를 자처하며 8만원 내외의 일당을 벌고 있다. 이날 마포구 홍익대 인근 식당에서 자신을 투어리더라고 소개한 태국 현지인은 관광경찰이 자격증 제시를 요구하자 한국인 가이드를 내세웠다. 일본어 가이드 자격증을 내민 권모(63)씨는 ‘일본어로 태국인 관광객들에게 설명이 가능하느냐’는 물음에 “영어로도 소통이 다 돼 문제될 게 없다”고 큰소리쳤다. 이날 하루 계도 조치를 받은 시팅가이드는 4명이나 됐다. 김휴영 관광경찰대 순찰팀장은 28일 “인솔 관광객들이 주로 쓰는 말과 자격증에 명기된 언어가 달라도 관광진흥법에는 단속 근거가 없다”며 “가이드와 관광객에게 일일이 대화를 시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관광객 유치에 혈안이 된 여행사와 면세점들도 가이드들의 불법 행위를 부추기고 있다. 일부 여행사는 아예 가이드 지침서에 ‘명동 등 관광경찰이 집중 단속하는 구간은 시팅가이드 있는 날 진행하라’는 요청사항을 명시해 놨다. 서울의 한 면세점은 매장에 방문한 가이드들을 상대로 ‘사복 관광경찰이 왔으니 조심하라’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처벌은 솜방망이다. 현행법상 무자격 가이드를 고용한 여행사는 1차에 시정명령을 받고, 2,3차에 사업정지(각각 15일, 1개월) 명령을 받아도 과징금은 최대 800만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최근 1년간 동일한 위반행위로 행정처분을 받은 경우’로 제한돼 1차 시정명령을 받은 뒤 1년이 지나면 사업정지 처분은 불가능하다. 무자격 가이드 당사자에게는 제재조차 없다. 관광경찰대 윤지영 경장은 “태국인 가이드 K씨의 비위 사실을 출입국관리소에 통보해도 길어야 5년간 입국을 금지할 뿐 별다른 행정조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러는 사이 한국을 가장 많이 찾는 중국인의 재방문율은 2011년 30%대에서 2014년 20%로 떨어졌고,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 수도 2003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 남완우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 사무국장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자격 가이드의 말만 믿고 한국의 왜곡된 이미지를 그대로 전파하고 있다”며 “편법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처벌을 세분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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