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서촌 길을 걸었다. 근 몇 년 사이 갑자기 각광받게 된 고풍스러운 길. 고즈넉한 아취와 겨울의 끄트머리에서 담 너머를 엿보는 듯한 봄기운, 그리고 미세먼지. 무슨 용무가 있었던 건 아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붐볐고, 삼삼오오 색감 짙은 한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젊은 여성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조금 산란한 기분이었다. 그저 더 완전히 혼자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수도, 시간과 과업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약간은 다른 각도로 세상과 비껴있고 싶은 심정이었을 수도 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지 않은 골목만 일부러 찾아 걸었다. 곳곳에 허름하게 붙어있는, 꽤 연혁 깊어 보이는 미장원이나 목욕탕 간판 같은 데 시선이 자주 갔다. 그 중 한곳은 한 가수가 운영하는 작은 책방. 가수와는 안면이 몇 번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가수는 없었다. 책을 몇 권 훑어보고는 그냥 나왔다. 북촌 쪽으로 털털거리며 내려오는데, 웬 여성이 아는 척을 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대학 후배. 근 10년만의 해후. 근처 찻집에 들어가 지난 일들을 수다 떨었다. 웃을 기분이 아님에도 많이 웃었고 후배는 발랄해 보이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후배와 헤어져 인사동 쪽으로 걸어 나왔다. 해거름이었다. 어떤 커다란 흑백사진 속을 떠돌다 나온 기분. 뭔가 확신하지 못한 사람처럼 뒤척이는 봄기운이 아직은 설익어 보였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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