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야권의 뿌리를 만들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의 한 축을 맡았던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가 27일 오전 3시 폐렴으로 별세했다. 지난달 27일 감기 증세로 입원한 지 29일 만이다. 향년 94세.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9년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5ㆍ16 군사정변 이후 반 군정 운동을 펼치는 등 자유당에 맞섰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정치권에 입문한 뒤 4ㆍ5ㆍ8ㆍ9ㆍ10ㆍ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야당 정치인이다.
이 전 총재는 해방 이후 우익학생 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의 대표의장을 지냈다. 친탁과 반탁이 극심하게 맞섰을 때 반탁반공운동 대열에 섰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친일 경찰 채용에 반대하는가 하면 한국전 중에는 학생들을 모아 ‘군번 없는’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 전선과 대구에서 참전하기도 했다.
이 전 총재는 한국 정치사에서 야당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955년 현 야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는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제자들이 만든 야당에 의해 후일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바로 민주당 창당이 이 땅의 민주정치의 시발이었다”고 적었다.
고인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유엔총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어난 5ㆍ16 군사정변으로 경유지였던 일본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형극(荊棘)의 길’에 올랐다. 유엔 총회에 함께 참석했지만 유진산 등과 귀국하지 않고 미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한국 군사정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영향이 중요하고, 동서 세력 분쟁의 장이 된 한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정치의 이면을 익히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그는 7년 동안 이어진 망명 생활 중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수학하는 등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히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신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김영삼(YS)ㆍ김대중(DJ) 두 전 대통령과 경쟁을 벌였다. ‘40대 기수론’의 바람이 본격화 하던 1971년에는 이들과 나란히 당내 대선 후보에 올라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1차 투표에서 YS가 최대수 표를 받았지만 과반에 이르지 못해 실시된 2차 투표에서는 사퇴해 DJ를 밀었다. 대선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976년에 신민당 총재(현 대표최고위원)에 올라 야권의 거목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이 전 총재를 보좌하던 양병용(67) 보좌역은 “박정희가 YS, DJ보다 두려워한 인물이 이 전 총재였다”며 “정치정화법에 묶여 10년 가까이 이어진 망명 등 정치공백 탓에 양 김(YS, DJ)에 밀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월남패망을 지켜본 그는 1976년 당수에 선임된 뒤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가의 안보와 자유는 대립적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조화의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양 김(YS, DJ) 등은 이 전 총재를 ‘사쿠라’,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등으로 몰아세웠다. 양 보좌역은 “양 김으로부터 많은 서러움을 받았지만 평생을, 최근까지도 중도통합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후 야당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장면, 윤보선 등과 함께 박정희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대안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 정치에 기여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하자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보수 우익 시민사회단체를 이끌었다. 건국50주년기념사업회 회장(1998년),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2007~2009년) 등을 지냈다. 최근에는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대한체육회장, 아시아역도연맹회장 등 스포츠분야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특별한 유지 없이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 이 전 총재는 생전 가족ㆍ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어수선한 세상에 대한 걱정’을 많이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 보좌역은 “돌아가게 되면 조의금, 화환 받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러 달라고 했다”며 “‘평양 가서 냉면 한 그릇 먹고, 평창동계올림픽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을 정도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컸다”고 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씨, 아들 동우(전 호남대 교수), 딸 양희(유엔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내달 2일, 장지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정민승기자 m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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