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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 가자면 어쩔 거야?" 아내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입력
2016.02.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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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헌의 구례일기] 38. 어떻게 살 것인가

정초 행사 잡음에 시끄러웠던 마을 총회

언짢은 회의 메모 버리려다 동전이 쏙~

쓰레기통 엎고 보니 왠지 모르게 허탈

50줄에 이만하면 잘 살았지 싶었는데

무책임한 '욕심 없는 자' 흉내였나 고민

가슴 깊숙이 찔러오는 아내 말에

슬그머니 게으름과 또 한 번 작별 고해

정월 대보름날 마을 주민들이 소나무 가지와 대나무로 엮어 만든 달집에 불을 붙인 뒤 손을 모아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주민들이 소나무 가지와 대나무로 엮어 만든 달집에 불을 붙인 뒤 손을 모아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저녁에 열린 마을총회는 무겁고 싱거웠다. 오죽하면 “뭐 이런 걸루다가 총회를 하구 그랴. 먹구 자기도 바쁘구마” 하는 분도 있었다. 그 분은 4시 반에 저녁 잡숫고 8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3시에 일어나시는 분이니 모두가 공감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한 쪽은 며칠간 언짢았고, 다른 한 쪽은 그 내내 억울했다.

모두 정초에 진행된 마을행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설을 앞두고 공동으로 마을청소를 하는데 이장이 그 날짜를 평일로 잡았고, 설날 공동세배는 내내 오후에 했는데 이장이 오전이라고 방송하는 바람에 혼란이 있었고, 대보름날 사용할 악기를 사면서 이장이 돈을 너무 많이 썼다는 게 문제였다. 어르신들은 이 모두가 젊은 이장이 어른에게 묻지도 않고 정해서 생긴 일이라고 역정을 내셨다. 이장은 “잘 해보려고 하다가 그런 건데 그러신다”며 며칠을 담배만 축내오다가 회의를 빙자해 모이십사 해서 고개 숙여 용서를 구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음모, 횡령, 빙자, 방임에 해당되는 내용은 없었지만 이장은 ‘죽을 죄를 졌습니다’하는 심정이었고, 어르신들은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는 표정으로 귀가하셨다.

집에 돌아와 옷 갈아입으며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과 종이가 한 움큼 잡혔다. 잡은 대로 꺼내보니 동전 20여 개와 총회에서 끄적거린 메모지였다. 발로 휴지통 뚜껑을 열었다. 잘 해서 동전은 살리고 메모지만 톡 떨어뜨리려고 했다. 살아오면서 느끼지만 의도와 결과는 대체로 달랐다. 가벼운 손에 메모지만 남고 동전들은 쓰레기 틈으로 숨어 들어간 것이다. 참사였다. 고등학교 때 “와! 곰 손바닥이다” “병신아, 곰이 손바닥이 어딨냐, 발바닥이지”로 시작해 친구간에 주먹 싸움을 야기했던 그 손으로 대충 꼼지락거려 해결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생각해보니 ‘꼼수’라는 말도 그렇게 나온 듯도 싶다.

봄이 오는 듯 포근하다가 눈발이 날리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반복되면서 아직 때 이른 매화 꽃이 노고단 설경을 배경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봄이 오는 듯 포근하다가 눈발이 날리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반복되면서 아직 때 이른 매화 꽃이 노고단 설경을 배경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가 바닥에 쏟은 다음 동전을 가려냈다. 머릿속에서 드론을 띄워 나를 내려다보니 쓰레기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꼴이 처량했다. 내 나이 지천명(知天命)인데... 공자 선생은 말씀이 참 많았나 보다. 별 얘기를 다해서 윤리 시험 때 애를 먹이더니, 쓰레기를 후비면서도 하늘의 뜻을 생각하게 하고 끝내 비참하게 만드는 지 모르겠다. 그 뜻이 뭔 지나 알려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던지.

50줄에 들어선 인생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학교와 직장 시절은 누구 못지 않게 뜨거웠고, 늦지 않게 시골로 내려온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인생 후반전은 조금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었고, 노동의 참 맛도 쓴 만큼 달다는 것을 알았다. 남한테 해 입히지 않고 살다가 막 굴린 몸뚱아리나마 쓸모 있는 것 남았으면 나눠주겠다고 계획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니 내 남은 흔적은 최소화 하고 없는 듯 지내다가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헌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자평하자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은 무책임의 극단이다. 뜨겁게 살고 그렇게 사랑하다가 불덩이 같은 아이까지 세상으로 불러놓고는, 이제 와서 뜨뜻미지근하게 마무리하고 빠져나가겠다니 참 못됐다. 나는 대강 살 궁리를 찾은 듯 하니 자식이든 남이든 알아서 잘 살든가 말든가 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학교 다니며 돌 좀 던졌답시고 시골에 와서도 말라빠진 노가리마냥 안주로 털어내고, 부끄러운 기자 시절 완장 덕에 돌아다닌 무용담이나 흘리고 다니는 꼴이라니. 그렇게 생각 없이 살다가 미필적 고의로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없다는 변명이다. ‘욕심 없는 자’로 보이고 싶은 ‘용서 받지 못할 자’의 화장술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젊은이들의 고통을 그들 몫으로 돌리고, “사람이 미래”라더니 앞길을 막는 짓이나 하는 어른들을 욕했지만 나도 그 어른중의 하나였다. 청년들이 뭣 땜에 아픈 건지, 이렇게 살다간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따져보고 고민할 시간도 힘도 주지 않았다. 편법과 요령을 알려줬고, 경쟁에서 이기라고 다그쳤다. 우리는 배고픈 시절도 겪어 봤는데 너희는 그 덕에 배는 불리며 살지 않느냐고, 굶은 적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위로랍시고 우긴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데,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든 사람이 아직도 많은데 말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노인회관에서 노가리, 단무지 등과 함께 고로쇠수액을 마시고 있다. 매년 이맘때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고로쇠 물이 몸에 좋다고 해서 마을 행사처럼 모여 물을 마신다.
마을 어르신들이 노인회관에서 노가리, 단무지 등과 함께 고로쇠수액을 마시고 있다. 매년 이맘때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고로쇠 물이 몸에 좋다고 해서 마을 행사처럼 모여 물을 마신다.

농사 한번 제대로 지어 뭔가 보여주겠다던 D동생이 얼마 전 농사를 접었다. 도저히 그 수입으로는 장가도 못 가겠다며 기름 배달 일을 시작했다. 왠지 그 후론 붉게 밝던 얼굴이 기름 색으로 변하는 것 같다. 일에 귀천이야 없겠지만 꿈이 그저 꿈으로만 남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서울에서 돈 번다던 마을 동생도 얼마 전 내려와 양봉을 하겠다고 했다. “뉴질랜드 벌꿀이 곧 들어온다는데” 말했지만 막노동보다는 나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어찌 해야 하나. 어느 선배의 말처럼 동학농민군의 대부분이 사오십 대였다 하니, 나도 뭐라도 움켜쥐고 불끈 일어나야 하는 걸까.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미래가 나아 질까. 사실 두렵다. 동학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판사가 동학혁명의 원인 제공자였던 탐관 조병갑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후로 ‘동학’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이런 비상식적인 역사가 아이들에게까지 굴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마당에 나에게 내려주는 하늘의 뜻은 도대체 뭘까.

다시 채운 쓰레기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TV를 흘깃 보니 좌우대칭의 재미없는 장면이 길게 나온다. 한참 시끄러운 국회 얘기인 모양이다. 입사시험 준비 때 상식 공부하다 알게 된 ‘필리버스터’라는 어려운 말을 요즘에는 몰상식에 가까운 우리 애도 다 안다. 선재는 상식이 모자라서 그렇지 사고방식은 상식적인 편이라 다행이다. “아빠, 나 친구들이랑 서울로 여행 갔다 올게” 아이가 불쑥 통보했다. “여행? 하려면 가출을 하지 무슨 여행을 가? 그리고 서울 살던 놈이 무슨 서울여행?” “가출은 겁나고…아이들이 같이 가자구 그래서. 내가 가이드 좀 해주지 뭐.” 선재는 부산 쪽을 가고 싶었나 본데 친구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아쉽지 않아?” 물으니 “여행 한 번 가고 말 것도 아닌데 뭐” 했다. 세뱃돈들 모아서 가기로 한 모양이다.

마을이장(오른쪽)과 어르신이 올해 농사 관련 제출 서류작업을 하고 있다.
마을이장(오른쪽)과 어르신이 올해 농사 관련 제출 서류작업을 하고 있다.

선재가 방에서 나간 뒤에 아내가 물었다. “누구 닮아서 저렇게 태평일까?” 고2 올라가는 애가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니 걱정도 되나 보다. 그리고 또 묻는다. “그래도 선재 보면 참 고맙지 않아?” 대답하려는데 묵직한 질문이 훅 들어온다. “유헌씨는 그 전에 사귀었던 언니들이랑 나랑 비교해서 누구랑 결혼했으면 참 좋았겠다 싶은 생각 한 적 있어?” 다시 어지럼증이 오는 듯 멍해졌다. 식은 땀을 숨기고 잘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 생각은 없고 그냥 당신 아니었으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 봤어.” 그건 사실이었다. 아이의 교육에 대한 아내의 생각과 가치관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나았을 거란 생각은 아니었다.

아내 표정도 괜찮고 잘 빠져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질문이 들어왔다. “내가 서울로 다시 가자고 하면 어쩔 거야?” ‘아니, 왜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지 잘 판단하고 대답해야 한다.’ “갑자기 왜?” 시간을 벌었다. 의중을 살펴야 했다. “아니 그냥 그럴 수도 있잖아” 했다. 얼마 전 SNS에서 ‘여자가 이해 못하는 남자의 행동’에 “안 싸우면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던데, 요즘 덜 다퉈서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한 게 나만의 착각이었나 싶었다. 이래 저래 속내를 재 보다가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글쎄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뭘까. 대답을 원한 것 같지 않았다. 뭔가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 같았다. ‘확 도망가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잘 해!’ 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뭐 꼭 잘 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시골에 내려와서 살면서 잘 해 준 것도 없었다. 사실 모든 것에 동의해 준 아내, 큰 걱정 안 끼치고 생활해 준 아들에게 고마움 모르고 살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덕분이란 것을 몰랐다. 그래, 가족이 하늘이었다. 아내는 하늘의 뜻을 전하고 싶었나 보다.

아스팔트 길 위를 흙덩이들이 덮어가고 있다. 트랙터와 경운기가 흘린 흔적들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기라고 곳곳에서 알람을 울린다. 미루고 늦추는 습관은 개나 줘버리고 한 번쯤 다시 변태(變態)를 준비할 때가 온 것 같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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