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 아닌 사람이 개설한 병원
최근 7년간 1000곳 가까이 적발
건강보험 재정 1조원 손해 끼쳐
노인들 꾀어 조합원 허위 등록한
의료생협 빙자 불법 병원 증가세
“내부자 자진신고 유도해야”
의사가 아닌 A씨는 이사회 회의록을 위조해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의료 생협)을 만든 후 2013년 1월 전북 김제시에 의원을 열었다. 그는 처음에는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던 고령 의사(82)에게 진료를 보게 했고, 2014년 10월에는 마비 증세가 있어 글씨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다른 고령 의사(84)에게 환자를 보도록 했다. 진료 및 처방 기록은 간호조무사가 도맡았고, 물리치료 자격증이 없는 A씨의 부인이 물리치료도 하고 주사도 놓았다. A씨는 이 같은 불법 행위로 2년 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약 4억5,000만원의 진료비를 받아 챙겼다.
의사면허가 없는 B씨는 자세 교정 및 운동치료를 하다가 벌금 200만원 처분을 받았다. B씨는 병원과 연계해 운동치료센터를 운영하면 수사기관의 단속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의사를 고용해 2013년 8월 서울 강남에 의원을 열었다. 그는 의사가 아닌데도 지난해 9월까지 이 의원 진료실에서 900여명의 환자를 봤다. 진료를 마친 환자는 의원 바로 옆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자세교정치료센터에서 운동치료를 받도록 하면서 B씨는 추가 수익까지 벌었다.
사무장 병원 최근 7년간 1,000곳 적발
최근 ‘사무장병원’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그 동안 감춰져 왔던 불법 병원 실태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무장병원은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의료인의 면허를 빌리는 등 불법적으로 개설한 병원을 말한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나 비영리법인, 국가 등만 병원을 개설ㆍ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문성을 갖춘 이들이 공공성을 바탕으로 병원을 운영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법을 비웃듯 최근 7년간 적발된 사무장 병원은 1,000곳에 육박한다. 지난해에만 220곳이 적발되는 등 2009~2015년 총 954곳의 사무장병원이 적발됐다. 심각한 문제는 환자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점이다. 과잉 진료, 무면허 진료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고, 심하면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다. 2014년 5월 화재로 21명이 사망한 전남 장성 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이 대표적인 예다. 의사 면허를 빌려 설립된 이 병원은 320여명이 넘는 노인들이 입원해 있던 대형 병원이었지만 스프링클러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아 참사를 불렀다.
영리추구가 목적이다 보니 불필요한 진료까지 받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병원 실제 운영자인 ‘사무장’에게 고용된 의사는 수익을 많이 내면 인센티브를 받기로 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다” 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2가지 약이 필요한 환자에게 5가지 약을 처방하고, 더 이상 안 와도 되는 환자를 3일 후 또 오라고 하는 방식으로 과잉진료를 할 개연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입원이 필요하지 않은 시술인데도 입원을 권하기도 하고, 입원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민간 보험에 가입한 환자는 입원을 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진료비와 보험금을 타내기도 한다. 사무장 병원은 이같은 ‘보험사기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의사들이 사무장 병원에 면허를 빌려주고 진료를 보는 건 대부분 경제적 동기 때문이다. 은퇴한 고령 의사나 병원을 차릴 여력이 안 되는 새내기 의사, 자신이 운영하던 병원 폐업 후 부채 등으로 인해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 의사’가 주로 사무장병원에 가담한다. 이처럼 의사의 진료능력을 확신할 수 없는데다 검사 장비, 안전시설 역시 제대로 갖추지 않는 경우도 많아 환자가 위험에 놓일 확률도 그만큼 높다.
브로커까지 등장… 의료생협 가장한 불법 병원 성행
건강보험 재정에 주는 타격도 크다. 사무장병원이 지난 7년 동안 건보공단으로부터 부당하게 타낸 돈(환수 결정 금액)은 1조1,3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건보공단이 회수한 금액은 이 중 8%도 채 안 된다. 보건당국이 검찰 및 경찰에 사무장 병원이 의심되는 곳에 대해 수사를 의뢰할 경우 수사통보까지 평균 3개월~1년 이상 소요돼 이 사이에 병원을 폐업하거나 팔아 넘긴 후 재산을 빼돌리고 해외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무장 병원 개설 준비와 운영에 필요한 행정절차 및 법률자문을 도와주는 전문 브로커까지 성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의료 생협’을 가장한 사무장병원이 늘고 있다. 의료 생협은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의 건강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관리해 줄 주치의를 두고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병원이다. 의료생협은 조합원 300명 이상이 최소 3,000만원을 출자하면 지방자치단체의 인가를 받아 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무장병원을 운영하려는 이들은 아는 사람들이나 무료 식사 등으로 노인들을 꾀어 조합원으로 허위 등록한 후, 자신들이 출자금을 대납해 ‘가짜 조합’을 만들어 병원을 연다. 지난해 보건당국과 경찰청이 의료생협 67개소를 조사한 결과 79%(53개소)가 사무장병원으로 드러났다. 적발된 사무장병원을 유형별로 보면 의사 면허를 빌려서 개설한 개인형 사무장병원은 감소하고 의료생협은 늘어나는 추세다.
내부자 신고 활성화해야
해악은 크지만 사무장병원은 특성상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병원 직원들조차 재무회계 등을 담당하는 직원이 아니면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적발된 병원의 절반 이상(52.3%)은 개설한 지 3년이 지난 병원이었다.
사무장 병원을 조기에 퇴출시키려면 내부자의 공익신고의 활성화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사무장병원 등 병원의 건보 부당청구를 내부종사자가 신고할 경우 최고 1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사무장병원의 의사나 사무장이 자진 신고할 경우 과징금 경감 등의 제도는 없다. 미국의 경우 사무장병원 등 부당청구를 자진신고 할 경우 수사절차를 생략하고 과징금도 경감해 주는 등 자진신고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김주현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사무장병원은 내부 고발 외에는 적발하기가 힘든 만큼 신고한 의사들은 면허정지 등의 행정처분과 벌금 등의 형사처벌을 어느 정도 면제해 주도록 해 신고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보건당국은 지난 16일 건보공단 내에 사무장병원 전담조직인 ‘의료기관 관리지원단’을 신설하기도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감시ㆍ단속에 주력했다면 앞으로는 사무장병원 개설 전력자에 대한 제재, 의료생협 설립 요건 강화, 의료인에 대한 교육 강화 등을 통해 사무장 병원 설립 자체를 억제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ankookilbo.com
채지선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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