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치스로 알려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전신은 뮌헨의 군소정당에 불과했던 독일노동자당이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사병으로 광적인 민족주의에 경도된 아돌프 히틀러는 뛰어난 웅변술로 1921년 독일노동자당의 당수가 된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는 이미 그 때부터 극단적 반(反)유태주의와 강력한 독재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내세우며 대중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양식 있는 시민사회에서는 히틀러의 ‘인기몰이’를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 패전의 절망감과 가혹한 경제난으로 피폐해진 대중이 유행병처럼 선동에 쏠리는 것 아닐까 하는 정도로 봤다. 수십 만 명이나 되는 독일 내 유태인을 ‘청소’하겠다는 주장도 황당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뒤엎겠다는 얘기도 ‘듣보잡’ 미치광이의 몽상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을 거치며 히틀러와 나치스는 폭풍 같은 질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불과 5년 만인 1934년 총통에 올라 확고한 독재를 구축하면서 본격적인 ‘유태인 청소’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 양식 없는 극단적 주장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하고 있는 점에서, 미국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최근 대선 질주는 왠지 히틀러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트럼프의 어록은 현실성도, 정당성도 없는 기괴한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철저히 봉쇄하자”거나 “경찰을 죽인 자는 무조건 사형시키자”는 얘기엔 실소만 나온다. 멕시코인들을 겨냥해 “마약과 범죄를 (미국에) 들여오는 강간범들”이라거나 “사우디와 한국은 미쳤다”는 거침없는 독설도 상식을 깬다.
▦ 트럼프와 히틀러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히틀러를 방치했던 과거 독일과 달리, 미국에선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트럼프 소속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그에 대한 견제가 강력하다. 문제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쇠락에 시달려온 미국 대중의 극단화 경향이다. 이 극단적 경향이 트럼프에 대한 뜻밖의 호응으로 분출됐고, 그게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압도적 3연승을 일군 셈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히틀러 집권 80주년을 맞아 “나치의 부상은 그걸 묵인한 사회 때문”이라며 “그 사실은 우리에게 영원한 경고가 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대선 상황이 참 흥미롭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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