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장에서 펼쳐진 52년 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이틀째인 24일 국회는 하루 종일 차분함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필리버스터 첫 발언자로 등장한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5시간 32분)과 세 번째 발언자인 같은 당 은수미 의원(10시간 18분)이 예상 밖의 긴 시간 동안 토론을 이어가더니 바로 다음 토론자로 등장한 박원석 정의당 의원도 9시간 29분 동안 발언을 계속했다. 이들 모두 전날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안의 문제점과 직권상정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특히 24일 오전 2시30분부터 문병호 국민의당 의원에 이어 세 번째 주자로 나선 은 의원은 1964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필리버스터에서 했던 ‘내가 여기 서 있는 한 (김준연 자유민주당 대표를) 체포하지 못한다’는 발언을 인용한 “우리가 여기 서 있는 한 테러방지법은 통과하지 못한다”라는 말로 토론을 시작해 눈길을 끌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은 의원이 발언한 내용을 문제 삼으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은 은 의원이 “테러방지에는 열을 내면서 일상에서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며 용역폭력이 극심했던 유성기업 사례를 들자 복도 중앙으로 나와 삿대질을 했다. 그는 “안건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정갑윤 국회부의장에게 제지를 요청한 뒤 야당 의원들과 설전을 벌였다.
은 의원이 단상에서 내려온 것은 낮 12시48분이었다. 특히 막판 15분 동안은 목소리가 잠겨 발언을 이어가기 위해 목을 가다듬는 경우가 잦았고, 컵에 물을 따르기 위해 물병을 들어 올린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도 보였다. 또 테러방지법의 인권침해 가능성을 설명하는 도중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밥 이상의 것을 배려해야 하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헌법이 있다”고 한 뒤 눈물을 삼키며 말을 잠시 멈췄다. 발언을 마친 은 의원이 비틀거리며 단상에서 내려오자 소속 의원들은 기립해 은 의원을 포옹했다.
은 의원 다음으로는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운동화를 신은 채 단상에 올라 토론을 진행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역사에 오점을 남길 수 있는 국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국정원에 대한 근본적 개혁 없이 국정원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는 테러방지법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처음 네 명의 의원들은 평균 407분(6시간 47분)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 이어 더민주 유승희·최민희, 정의당 김제남, 더민주 김경협·강기정, 정의당 서기호, 더민주 김용익·김현 의원 등의 순으로 무제한 토론자가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버스터라는 낯선 상황이 벌어지자 국회에서는 진풍경들이 연출됐다. 새누리당은 이날 새벽 상임위 별로 3명씩 조를 편성해 본회의장에 의원들을 배치했다. 의제를 벗어난 야당 토론자의 발언과 과도한 정치 공세성 발언을 감시ㆍ제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단은 당번을 정해 국회에 남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반면 더민주는 상임위별로 30~40명 규모의 ‘응원조’를 편성해 본회의장을 지키게 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장단도 비상 근무표를 만들었다. 정 의장과 정갑윤ㆍ이석현 부의장까지 3명이 돌아가며 1시간 반씩 의장석을 지키고 3시간을 쉬는 식이다. 의장실 관계자는 “정 의장은 장시간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 출신이라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다”며 “국민 보기 송구스러워 식사도 집무실에서 해결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회사무처 직원, 그 중에서도 의정기록과는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의 발언은 물론 숨소리, 본회의장 분위기까지 기록하고 있는 국회 속기사들은 2교대 근무체제로 전환했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역대 하루 업무량으로 치면 가장 많은 날 같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npr@hankookilbo.com
정민승기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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