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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TV 출연하고 질책 받은 사연

입력
2016.02.2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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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어찌 TV에 물경 한 시간을 출연했었다. 80세 이상 되는 노년들의 살아 온 이야기를 하는 프로였다. 나야 엄밀히 말해서 아직 80도 덜 되기도 했거니와 도무지 그런데 나갈만한 깜냥이 못 되기에 말로 하는 사양이 아니라, 진정코 고사 고사하다가 출연하고 말았다.

출연하고 난 후 여기 저기서 좋았다는 사교성 멘트를 받고 보니, 기분이 좋아지긴 했었다. 근데, 이를 어쩌랴. 내게는 제일 가깝다 할 나의 딸과 소위 베스트 프렌드라 할 친구로부터 지독한 질책을 들었다. 나는 그만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딸 왈 “이제 그런데 그만 나서세요.”얘는 어미가 어찌어찌 사회생활 비슷한 걸 하는 걸 본래 마뜩잖아 해왔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삶을 선호하는 아이였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근데 베스트 프랜드의 질책은 보다 가혹했다.“아니, 지금 우리 나이에 주름투성이 얼굴을 들고서 너는 만인이 보는 그런데 나가고 싶니?”나는 잘못을 변명하는 학생처럼, 나도 모르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 “아냐, TV에서는 주름이 잘 안보여….” “분장을 처덕처덕 해줬나 보지.”

노년의 특징은 ‘분별력이 흐려지는 현상’이라더니, 드디어 나도 분별력이 흐려지는 지경에 이르렀나 보다. 나만 모르고 있었는가 보다. 그렇담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나는 일찍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라는 시를 코에 걸고 살다시피 했었는데. 은퇴할 그 때 바로 은퇴하고, 죽을 그 때 바로 죽으리라 다짐을 50대부터 해오던 터였다. 나는 속으로 죽기 좋을 나이는 77세라고 정해 놓기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런 저런 일로 바삐 지나다가 “에구머니, 내가 어느새 죽을 나이가 됐네”하구 혼자서 놀랬던 생각이 새롭다. 죽기에 적당하다던 나이에 나는 새로운 책를 쓰고 있었고, 몸과 맘이 아직은 그런대로 지낼 만 했었다. 뭣보다 죽을 나이라던 77세가 되고 보니, 나라 전체의 평균 수명이 77세가 넘어 섰고 더구나 여성들의 평균수명은 80이 넘어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시대로 치닫더니, 어느새, 100세 시대가 진짜로 왔다. 우리 또래들은 그냥 저냥 살아가면서 아무도 죽을 것이라 생각 안하고 있다. 또 100세 부모를 모시고 사는 내 또래들은 100세 시대를 평상의 일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래도 말로는 100세 100세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설마’하는 맘으로 100세를 실감 못하고 있다. 특히 변화에 민감하다는 젊은이들이야말로 아직도 전혀 100세 시대의 도래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점에서만은 100세 시대를 몸으로 실감하고 있는 노년들에 비해서 둔감하다 하겠다. 젊은 저들은 어쩌면 80, 90된 부모들을 이제는 그만‘배웅하고도 남을 나이’로 보고 있는 것 아닐까.

사람의 일생을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구영한ㆍ邱永漢). 일생에 걸쳐 할 일을 다 한 사람은 일생을 사는 게 맞지만, 일생에 한 일로는 부족해서 일생을 산 후, 이생에서도 일을 더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는 누구라도 일생만 살고, 일생에만 일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부득이 일생 이생 삼생, 시쳇말로는 2모작 3모작인생을 살아 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미래학자들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나무랐던 내 친구는 일생을 남들 일생 일 한 것 이상으로 잘 살았었다. 100세니 뭐니 그런데 귀 기울일 필요 없이 자신 있게 70세 전에 전방위적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어언 은퇴생활이 20년이 넘었다. 그 동안 겨울엔 따뜻한 나라로, 여름에는 시원한 나라로 피서 피한을 다니며 지내다가 이제는 따뜻한 나라 시원한 나라 찾아 다니기도 버거워졌단다. 일과 일 사이에 노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놀고 쉬며 지내기에는 너무 길고 긴 노후였을 거다. 이런 판에 TV출연을 하는 또래가 못마땅하기도 했으리라.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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